스타? 배우는 관객의 노예야. 내가 왜 울고 웃고 하면서 관객의 노예가 되야 돼? 하면서 코웃음 치던 옥자는 당당하게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체육과에 들어갔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체육하려고 대학교에 들어가는 사람은 좀 골 비었다고 생각만 했지 체육과를 나오면 여학교 체육교사가 된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애가 인물도 좋고 잘빠졌기 때문에 그 당시 아름다운 악녀라는 영화로 인기 있던 최지희와 비교하면서 옥자는 우리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열심히 팔 다리 흔들며 체조만 할 줄 알았던 그 애가 뜻밖에도 어느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부잣집 딸로 순수한 대학생 남자한테 외면당하는 남녀 주인공 사이의 얄미운 역이었다. 그 뒤 김은주라는 예명으로 몇 번 더 얼굴을 비치다가 전연 나오지 않더니 인천에 있는 어느 여학교 체육교사로 다시 재직한다는 말이 들렸다. “연예계 물먹은 애가 그걸로 만족하겠어? 나중에 돈 많고 잘생긴 어느 남자의 애첩이 될꺼야 두고 보라구.”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그 뒤로 깜빡 잊어버리고 살았다.
우리중에 서울로 유학간 친구는 그 애가 단 한명이었고 동네 친구 가운데 또래 남자들 가슴을 써늘하게 만들던 백바지 클럽에 가입해서 바지속 종아리에 아이구찌를 차고 다니는 아이도 있고 방직공장에 나가는 친구며 언젠가 모두 함께 찍은 묵은 사진앨범을 보며 옥자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가끔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사진을 볼 때 그때 분이었다. 재일교포와 결혼 했다느니 검사하고 결혼했는데 이혼했다느니 하는 믿을 수 없는 말만 들리다가 모두 다 시집가고 뿔뿔히 흩어졌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흐르고 나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던 우리 아들이 거기서 참한 색시 만나 결혼하고 자꾸 오라는 것을 미루다가 몇 달전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미국은 우리나라 사람 다 데려와서 풀어놓아도 표시나지 않을 만큼 어찌 그리 넓고 빈 땅이 많은지 차를 타고 나가면 저런 풍경 좋은 곳이 한국에 있다면 상춘객들이 미어질 만큼 멋지고 좋은 곳도 사람사는 집 하나 없이 그냥 조용한 것이 말 그대로 신천지였다. 그날 나는 미국 길도 익힐 겸 차를 몰고 한참 나갔는데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연 방향 감각이 되지 않았다. 개스스테이션도 보이지 않고 어쨌던 이길로 가보자고 슬슬 들어가는데 시골 냄새나는 라운지가 하나 보였다. 옳다구나 여기서 물어보자 하고 차를 세우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옥자를 만났다. 서로가 즉시 알아보고 입만 딱 벌렸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이렇게 다 만나는구나.” 하고 옥자가 말했다.
“미국온지 얼마안된 사람이 운전을 다해?” “한국에서 운전한 사람은 미국에 오면 운전하기 너무 쉽잖아? 우리 며느리 차야. 미국에는 언제 왔어?” “몇 십년 됐어. 영화 감독하는 사람을 만나 배우 생활도 조금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외교관 남자 만나 세계 여행 좀 하겠다고 덜컥 결혼했는데 글쎄,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 빠지려면 적어도 십년 이상 아프리카며 생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오지에서 그야말로 마실물도 제대로 없이 생활해야 되는거야. 일이년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기기 때문에 사고 싶은 예쁜 식기하나 못사고 집을 꾸밀 수도 없다 얘. 그리고 무슨 법인지 외교관 부인은 일도 못하게 되어 있어. 완전히 피난민 생활이야. 그 생활 끝내면 돈벼락 맞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내가 그런 고생을 해? 즉시 이혼하고 혼자 미국으로 왔어.”
“그동안 고생 많았겠구나?” “내가 고생할 사람으로 보여? 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 말이야. 일하는 것을 모두다 고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드라 얘. 미국에 살면 밤새 마당에 달러가 눈처럼 내려쌓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지 꼴랑 라운지 하나 운영하면서 한국사람 직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야.” “너무 후진곳에 있으니까 그렇지. 여기는 버스도 없고 승용차 타고 시내로 나가려면 1시간 이상 걸리잖아? 주급이 빤한데 누가 여기까지 오려고 하겠어? 지금 남편은 미국와서 만났어?” “응, 결혼한지 얼마 안됐어. 나야 남자 경력 하나는 끝내 주잖니? 옛날에 영숙이 한테 말 들었는데 내가 돈많고 잘생긴 남자 애첩이 될거라고 했다면서? 잘봤어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나이를 먹고보니 외로워서 안되겠드라. 우리 이 남자 남편이라고 같이 살고 있지만 가진 것 아무것도 없고 인물도 없고 그야말로 무능력자지만 서로 얼굴 맞대고 그렇게 살고 있어.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까 옛날에 가졌던 욕망이 다 사라져서 그런가 봐. 아, 저기온다. 내가 인사시켜 줄께.”
마침 밖에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옥자가 옛날 자기 친구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남자를 마주보며 새침떨지 않고 아무 감정없이 그냥 고개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는 가겠다고 말하고 밖을 나왔다. 올때는 몰랐는데 돌아가는 길은 꾸불꾸불 수없이 많은 커브를 돌고 얕으막한 언덕도 지나면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차만 몰았다.
사람이 살아 있으니 다 만나게 되는구나.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태연했는지 모르겠다. 내 차가 안보일 때 까지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한때 나하고 정말 너무도 가까웠던 사람이었지만 이제와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우리 아들도 미국 나이로 치면 이제 만 40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있다가 평양에서 피난 내려와서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같이 살던 남편이 어느날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옥자가 자기 남편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가 바로 우리 아이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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