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훈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라벨’ 연주회
정명훈과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의 연주를 가까이서 자주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국인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명훈(57)은 우리에게 정경화, 정명화와 함께 무려 40년여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이었다. 원래 피아니스트로서 19세 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 입상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이후 곧바로 지휘자로 변신했다는 것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것은 지난 10일 UCLA 로이스홀에서 열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라벨 연주회가 처음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지휘자로 진로를 변경한 후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곳이 이곳 LA 필하모닉이었다는 사실이다.
우아하고 절도 있는 아름다운 몸짓
지휘봉과 혼연일체 된 오케스트라
관능적이고 세련된 선율 만들어내
그의 스승 칼로 마리아 줄리니가 1978년부터 84년까지 LA필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때 부지휘자로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나이 지긋한 LA 음악팬 중에는 젊고 패기 넘치던 당시 한국인 지휘자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80년대 LA를 떠난 정명훈은 이후 한 번도 이곳에서 연주한 일이 없으니 거의 30년만이라고 해야겠다. 이날 로이스 홀은 수많은 노인 청중들(대개의 클래식 음악회가 늘 그렇듯)과 수많은 프랑스계 미국인들(곳곳에서 불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호기심과 기대로 눈을 반짝이는 미주 한인 음악팬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정명훈은 그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대에 넘치도록 부응했다. 그의 지휘가 얼마나 카리스마틱 하고 멋있던지, 라디오 프랑스는 그의 지휘봉과 혼연일체가 되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던지, 라벨의 음악들은 또 얼마나 감미롭던지,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은 ‘브라보’를 외치며 끝없이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듣기만도 쉽지 않은 4개의 작품 전체를 암보하여 열정적으로 지휘했다. 모리스 라벨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까칠하고, ‘볼레로’처럼 관능적이며 동시에 폭발적인 격정으로 듣는 사람을 뒤흔드는데, 정명훈은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우아하고 절도 있는 지휘로 음악을 만들어나갔다. 그는 연주장의 에너지를 모두 그의 손 안에 모아들여 이리 저리 필요한 곳에 나눠주는 것 같았다. 세밀한 음 하나, 악기의 표현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과 철저함은 아주 가는 수많은 선을 치밀하게 엮어서 굵게 그린 그림과 같았다. 수년 전 정명훈을 인터뷰한 CNN의 로레인 한은 “지휘봉 하나로 전 세계인에게 음악의 마법을 펼치는 지휘자”라며 “그가 세계 정상인 이유는 작품에 담긴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극찬했는데 그 찬사가 그대로 느껴지는 연주였다.
이날 ‘세헤라자데’를 협연한 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공주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천일야화를 들려주듯 아름답게 노래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압도적이어서 아름다운 불어로 들려주는 노래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점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마지막 작품 ‘라 발스’는 정말 함께 월츠라도 추고 싶을 만큼 격렬하게 아름다웠다. 정명훈도 이때는 절제된 움직임을 버리고 춤을 추듯 리드미컬한 연주에 몸을 실어 비엔나 왈츠의 선율을 가장 라벨적으로 담아냈다. 그 자신도 연주가 만족스러웠는지 마지막 지휘봉을 내리면서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띠었으며 계속되는 환호에 거듭 겸손한 인사로 화답했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너무 훌륭했다는 것도 언급해야겠다. 그들은 지난2000년도부터 호흡을 맞춰온 정명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거만할 정도로 일사불란하고 세련된 소리를 만들어냈다.
어쩌면 정명훈은 프랑스의 음악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음악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현대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 음악의 전문가이며,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의 음악감독과 지휘자를 지냈으며, 프로방스의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한국어보다 불어가 편하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주로 유럽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미국에는 자주 오지 않는 그의 연주를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난다. 그는 미국에서 자라고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졸업했지만 미국의 음악세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한 인상이 한국서 나온 인터뷰 기사들에서 느껴졌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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