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 나들이에서 느꼈던 정과 포근함도 잠시, 돌아 와 지낸 이번 겨울 ! 세월의 흘러감을 아쉬워해야 할 나이 인데도, 나는 너무도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 온 것 같다. 그리고 영하의 체감온도 란 차가운 겨울을 난 것 같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 일에서 내가 너무나 멀리 비껴 나 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서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물 가뭄을 해갈(解渴)해주는 반가운 빗줄기를 창 너머로 바라보면서도 고마움과 비에 얽힌 어떤 낭만 같은 것을 느끼지 못 하고, 되레 지루 하다는 짜증스런 생각에 젖을 뿐 아니라 , 예전과는 달리 올 들어 많은 나날에 거리에 깔리는 새벽안개를 바라보면서도 헴프리 보카드가 출연 한 영화 ‘가스등’의 가로등을 휘감은 그 안개의 정서 같은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자식들의 출근길을 걱정하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멋없는 생각 ! 이게 바로 물이 빠진 노목(老木)처럼, 인생 나목(裸木)이 되어 가는 내 몸에서 꿈과 낭만 같은 정서가 증발해 버렸다는 그 까닭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차갑고 길게 느껴졌던 겨울도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듯이 따사하게 깔리기 시작한 봄기운에 우리 집 뒤뜰 감나무 가지에 벌써 뾰죽뾰죽 새순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느 해와 같이 이 감나무에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는 할멈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가지치기를 끝낸 할멈이 돋아 난 새순을 어루만진다. 분명 그는 새순을 쓰다듬으면서 이미 멀어져 간, 그의 젊고 발랄했던 인생의 봄을 되씹어 보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가 지나면 새순에서 도토리만 한 감이 얼굴을 내밀 것이고, 그리고 가을이 되면 그 감이 빨갛게 맛이 들겠지. 그러면 봄 한 철, 애써 가꾼 주인마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동네 다람쥐들이 달려 와서 감을 가지채 꺾어 물고 달아나겠지. 그리하여 감나무에서 감이 다 사라지고, 잎이 떨어져 버리면 또 한해의 겨울이 찾아오겠지 !
나는 우리 집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그 옛날 내가 여덟이나 아홉 살 때 찾아 간 시골 할머니 집 돌담 가에 서 있던 감나무를 생각한다. 그 가지에 한 톨 댕그랗게 달려 있던 빨간 까치밥을 회상(回想)해 본다. 그 때만 해도 나는 감나무 가지 높이 달린 빨간 감이 우리나라 농촌의 인심을 상징하는 까치밥이란 것을 몰랐었다. 단지, 그 감을 쳐다보면서 밤에는 춥겠다. 높은데 달려서 어지럽겠다! 라는 동심(童心)어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70여년이 지나 할아버지가 된 지금, 내가 어쩜 그 때 그 할머니 집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그 한 톨의 까치밥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지 않았나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미주문단(한인문단)에서와 본국 아동문학 문단에서 최고령 현역작가(現役作家)로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연극계와 극작계(劇作界)에서 극작가 하유상(河有祥) 말고는 내가 제일 나이든 연극인으로써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 뿐인가 8.15 해방 당시, 40명이었던 내 중학 동기생 중, 거의가 마지막 달린 까치밥처럼 떨어져 가고, 지금 현제 나를 포함해서 일곱 명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도 올 해 70을 훌쩍 넘어 선 목사인 동생 정민이가 안부전화를 걸어오면서 형님, 백 살까지 살겠소!라고 덕담(德談)을 던진다. 옛날 같으면 액키 ! 악담하지 말라 !’라고 귓전으로 흘려버릴 말이지만, 글쎄, 하는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100살까지 살면 뭘 하나? 싶은 생각이 앞선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올 해도 내년에도 우리 집 뒷마당의 감나무에는 봄이 가고 또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빨갛게 감이 익을 것이고, 감이 익으면 작년의 그 에미 다람쥐가 아닌, 새끼 다람쥐가 커서 제 에미처럼 감을 따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옛날 할머니 집에 지금 그 누가 살고 있는지 몰라도 그 돌담 가에 서 있던 감나무에 올 가을에도 틀림없이 까치밥이 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고목(古木), 다시 말해서 나목에는 계절의 봄이 와도 잎이 피지 않고 또 한 해의 가을이 와도 까치밥은 열리지 않는 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다시 한 번 되씹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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