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오면 도너츠를 먹고 싶은 이유가 처음에는 왜 그런지 전연 몰랐다. 미국에 오던 첫 해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비 내리는 창 밖을 보면서 문득 나는 너무도 간절하게 도너츠가 먹고 싶었다.
한국에 살 때 비가 오면 부침개를 해먹고 싶듯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도너츠가 갑자기 왜 그렇게 먹고 싶은지. 그래서 밖에 나가 도너츠와 커피를 사 들고 집에 와서 남편과 같이 먹은 게 이젠 버릇처럼 되어 비만 내리면 꼭 도너츠를 먹는다. “당신 이상하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왜 비 오는 날이면 구멍 뽕 뚫린 동그란 그것만 먹고 싶다는 거야?” 남편이 수상쩍은 눈으로 말했지만 나도 모르겠다. 자꾸 먹고 싶은걸 어떡해?
그날은 이틀간 연달아 비가 내렸고 남편은 아침 밥 대신 이틀 동안 먹은 도너츠 때문에 속이 달달하고 부둑하다면서 호박죽이나 깻죽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차를 타고 산호세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나오는 길에 한국 마켙에 들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을 살면서 산호세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 내 머리를 손질하던 미용사가 산호세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얼굴 만지고 가다듬는 일이 습관이 된 나는 순전히 미용사 따라 거기까지 갔던 것이다.
내가 봉지죽을 몇 개 사고 곱게 화장한 얼굴에 머리도 잘랐겠다 또 필요한 것이 없나 하고 매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막 진열장 코너로 돌아서는 한 사람의 얼굴이 확 눈에 띄었다. 설마 그사람이?! 그러면서 급히 따라가 옆에서 확인하는 순간 아, 나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그 남자 앞에 우뚝섰다. “안녕하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누구신지?” 그 남자는 기억을 더음으려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전연 몰라보는 눈치였다. 남자는 20대의 얼굴이 한평생 늙어가지만 여자는 하룻밤 사이에 너무도 다른 세상처럼 성숙하고 다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 남자가 30년전의 여자 얼굴을 금방 기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 깻님이예요.” 깻님이라니?! 아, 깻님이! 남자가 그제야 놀란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옛날 영화에서 보던 얼굴하고 또 틀리구만?” “그때가 언젠데요?” “장 다 봤어? 어디가서 커피나 한잔 할까?”
그는 무얼 샀는지 조금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한국마켓 옆에 있는 커피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막상 앉고 보니 조금은 멋적은 기분이었다. 어느날 벼르고 벼르던 끝에 기여히 영화 배우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나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영화감독하고 결혼할 때도 그렇고 지금의 남편 만나 미국으로 오기직전 다시 못올 땅인데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어릴 때 죽은깨가 많아 깻님이라고 부르던 내 이름이 생각나면서 내가 사랑했던 이 남자 얼굴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리고 단지 그뿐이었다. 내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이 남자를 보자 흘러간 시간이 그리운 것처럼 만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나는 한때 주간지에서 앞다투어 제2의 문희라는 소리를 듣던 영화배우였다. 딱 한번 신성일과 주연배우로 영화를 찍었지만 그 영화가 힛트 했드라면 뚤려놓은 아스팔트 길처럼 김지미 부럽지 않는 배우가 될 수 있었는데 그만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신성일에게 퍼붓던 아름다운 그 대사를 기억한다.
“악마!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당하다니 너무 분해. 악마!” 그러면서 철썩 신성일의 빰을 때리는 요즈음은 좀 우스운 그런 영화였다. 그 후로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얼굴을 많이 찍었지만 끝내 주연배우로 대성하지 못하고 조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연예인이란게 일년만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 머리속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나는 일찍 이혼하고 비밀요정도 하고 뚜쟁이 비슷한 짓도 하다가 사업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둘이서 짜고 돈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그날 남자는 우습게도 입이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듯이 여자를 아주 발아래 깔고뭉게는 말을 많이 했다. 옛날에 상처를 준 나 때문에 그런가? 지금 저 사람과 같이 사는 여자는 남자 기세로 보아 숨한번 제대로 못쉬고 꽉쥐여 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쯤하고 내가 일어나야지 할 그때였다. 갑자기 웬 여자가 기세등등하게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남자한테 고함을 질렀다. “아니, 당신 장을 다 봤으면 빨리 집에 와야지. 시계를 보니 5분을 초과했길래 5분이 뭐야? 6분이야. 혹시나 하고 왔더니 역시! 여기서 뭘해? 당신 또 내 속 끓는 그 버릇 도졌어? 집에가서 보자!” 여자는 따발총같이 쏘아붓고는 휭 밖을 나갔다. 집에 가서 보자니? 아이구, 그 여자 되게 무섭네.
나는 밖을 나와 돌아서는 순간, 구부정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전연 생각지 못했던 한가지 기억이 그림처럼 불쑥 떠올랐다. 나같이 닳고 닳은 사람이 아직도 내 의식의 밑바닥에 그 비밀이 몰래 숨어있었드란 말인가? 그래 비오는 날이었다. 그날이 남자와 같이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서 둘이서 도너츠를 먹은 아련하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난데없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아, 나는 눈물이 핑 돌면서 그제야 알았다. 비오는 날 먹고싶은 도너츠의 비밀이 바로 오래전에 잊었던 그 사랑의 미련일 줄이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살면서 생활의 허전함을 느낄 때 가끔 단 한번 사랑했던 그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 우산위에 뚝뚝 떨어지던 빗소리를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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