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 “36년 전 내가 해병대에 입대한 날”을 상하로 옮겨 보았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이메일로 힘을 주고 전화로 용기를 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만난 현실은 혹독했다. 가난이 해병대에서 겪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 아팠다. 비록 고향 찻꼴(차골)에서는 부농(?) 소리를 듣는 집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식 이야기였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논밭을 다 팔아도 서울에 집 한 칸이나 마련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대학 등록금은 좀 비쌌던가?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며 자조적이 되곤 했던 기억이 있다. 원래는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했으나 시골에서 소를 판돈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또 집안을 빨리 망하게 하고 싶으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천천히 망하게 하고 싶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우리 집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미 아버지는 연세가 일흔 가까이 되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쉰한 살에 늦둥이로 나를 보았으니 경제활동을 하기에는 연세가 너무 많았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으니 어떻게 감당을 했겠는가? 사실은 대학 첫 학기만 등록금을 받기로 하고 나 역시 대학에 진학했던 터였다.
제대 후 나에게 닥친 두 번째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76년 9월, 건국대 1학년 2학기로 법대에 복학했을 때 내 나이는 한국 나이로 스물넷이었다. 돈도 실력도 갖추지 못한 가난한 복학생에게 닥친 24세 나이는 참담했다. 군대 가기 전, 그러니까 스무 살 시절만 해도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제대를 하고 보니 달리 도망갈 곳도 없고 현실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복학과 동시에 나는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도 변변하게 다니지 못했던 내가 바로 고시에 응시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선 종로 학원가에서 고시 공부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 나는 옥인동에 있던 큰형님 집에서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나왔다. 머리 굵은 시동생이 얹혀사는 게 미안해 형수에게 아침까지 챙겨 달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종로 2가 학원 골목까지는 20분 남짓 소요됐다. 학원에 도착하면 5시가 조금 넘었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음에도 대입 검정고시 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새벽 시간을 택해 대입 검정고시 학원에 다시 다녔던 것은 정신적으로 나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를 기초부터 다시 배워보고 싶었다. 다른 과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됐고, 또 외우는 데는 나도 일가견이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영어는 고등학교를 워낙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녔던 까닭에 기초가 부실했다. 그 실력으로는 사법고시 시험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고, 강의를 따라가기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정통 종합영어로 불렸던 성문종합영어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는 것으로 영어공부의 가닥을 잡아갔던 것이다.
영어가 부족하던 그때, 내 생활공간은 영어 단어로 가득했다. 방 천장에도 영어 단어, 벽에도 영어 단어, 방바닥에도 영어 단어, 화장실에도 영어 단어 하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당시 가장 많이 입고 다녔던 예비군복 바지의 구석구석에도 영어 단어가 적혀 있을 정도였다.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쓰고……. 돌이켜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했다. 공부와 놀고 공부에 풍덩 빠져 헤엄을 쳤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고시공부는 꼭 2년반 만에 접었다. 가정형편이 유복해 몇 년, 몇 십 년을 공부만 해도 되는 입장이라면 몇 년간의 고시공부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고시폐인’들은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했다. 처음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나중에는 고시 공부 아니면 달리 할 것도 없어 고시에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은 논 팔고 소 팔아 학비를 대고, 여동생은 봉제공장에 다니며 오빠의 용돈을 대는 식으로 고시 공부를 하는 모습은 흔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고시 공부를 계속하다가는 인생도 망치고 집안도 망치겠다 싶었다. 판검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나에게 맞는 길을 찾자. 그리하여 3학년 1학기, 두 번째 응시한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를 보고 고시 공부를 걷어치웠다. 아주 매정하게, 미련을 남기지 않고 사법고시를 정리해 버렸다.
(213)999-4989
남문기 / 뉴스타 부동산 대표
ceo@newstarreal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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