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티모어의 조용한 동네에서 14년 동안 살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입양아를 이제야 갖게 되었다고 미국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아주 극진하게 잘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가지마세요.”하고 나는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입속으로 간신히 말했다. “내가 너를 더 이상 돌볼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아버지는 나의 친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정말 떨어지기 싫었다. 어머니가 죽지 않았드라면 나는 애초부터 미국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그렇게 했는지 몰랐고 그 당시 내 나이는 6살이었다. 어머니는 우물곁에 신발을 벗어놓고 동그랗고 깊은 물속에서 빠져죽었다. 어머니가 우물에 빠져죽었다는 사실을 안것도 벗어놓은 신발 때문이었다.
나하고 같이 비행기를 타는 열 댓명의 사내 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빡빡 깍았다. 비행기는 밤새도록 날아가서 어느곳에 도착했고 나는 겁이나고 무서워서 우리를 데리고 왔던 남자 다리를 덥석잡고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가지마!” 그것이 내가 미국에서 사용한 마지막 한국말이었다. 나는 지금에사 14년 동안 같이 살았던 양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장거리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는 한번 집을 나가면 길게는 보름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머니가 어떻게?!” 내가 결혼하려고 했던 쟌은 컴퓨터를 전공하고 막 회사에 들어간 신출내기 착한 시골 사내였다. 그때 만약 어머니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빌었드라면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변했을지 그것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술취한 사람모양 고함을 질렀다. “너 동생을 하나 더 갖고 싶었어. 갖고 싶었단 말이야!” 나는 학비 면제의 스테이트 대학도 미 전국 수영대회 1위라는 타이틀도 미련없이 동댕이치고 집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가다가 쉬고 쉬기를 계속하는 화물열차에 무임승차도 하면서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고헨이라는 나를 가르키던 수영코치 아버지가 장의사였는데 그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던 것을 기억했다. “죽은 사람 얼굴을 화장해주는 기술을 배우면 인종편견도 받지 않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야. 죽은 목숨이니까 그냥 돌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돼.” 고헨이라는 이름은 유태인들 사이에 특별히 존경받는 가분좋은 이름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는 당장 내일을 생각해야 하는 그 상황에서 직업이 필요했고 고헨 코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조수로 일할 수 있는 괜찮은 선을 연결받았다.
내가 미리암이라는 사수 밑에서 거의 일을 다 배워갈 무렵 그날 밤 죽은 한 여자의 얼굴 화장을 특별히 주문받았다. 대다수 미국 사람들은 평소의 모습을 말하며 이렇게 이렇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미리암과 나는 죽은 여자 얼굴을 완전히 분홍색으로 밝게 화장해주고 머리도 고전식으로 부풀러 주었다. 그런데 내가 드라이로 부풀린 머리를 마무리하는데 빗끝에 딱딱한 무엇이 걸렸다. 무언가하고 자세히 살펴봤더니 목 뒷덜미의 움푹 들어간 급수에 굵은 못이 하나 박혀있었다. 죽은 여자는 마피아 캄비노 가문의 2인자 부인이었고 이혼하겠다고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그 부인을 피 한방울 나지않는 그런 수법으로 교묘히 살해했던 것이다. 시체를 조사하는 옵탑시도 찾을 수 없는 참으로 가공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났다. 미리암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적당한 보상금을 쥐고 어디론가 갔고 나는 국가에 공헌한 연방 증인 보호규정에 의해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 법무성에서 새로 만들어준 소시알번호며 이름까지 모두 바꾸고 FBI의 보호아래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가야했다.
샌프란시스코! 세계의 유수한 선수들이 다 오는 미국내에서 가장 완전한 수영코치를 받을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나는 전부터 가보고 싶었다. 살면서 가끔 금문교 다리 위에서 바다에 빠져 내 몸뚱아리를 상어가 모두 뜯어먹고 나는 그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온 첫날, 하늘아래 석양빛으로 붉게 물든 장엄하고 아름다운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이상하게 용솟음쳐 오름을 느꼈다. 그래, 나는 혼자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은 사람 얼굴을 만지며 그동안 마음에 드는 남자도 사겼다.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 얼굴을 화장해주는 어찌보면 으시시하고 무서운 직업을 가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남자한테 어이없이 배신을 당한 그날 밤 나는 뜻밖에도 눈에 익은 한 남자를 보았다.
샌프란시스코까지 와서 죽은 그 사람. 바로 벌티모어에 살았던 나의 양 아버지였다. 장거리 트럭 운전을 핑계로 교묘하게 잘도 어머니를 속였던 사람. 조문객들을 보고 나는 양아버지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그때 이미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은 결정된 순서였는지 모른다. 잠자리에서 거들떠 보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어머니는 그럴수 밖에 없었구나. 이제 나도 한 여자로써 40대의 성숙했던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울었다. 울면서 처음으로 파란눈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했다.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어머니라는 그말은 언제나 나에게 그립고도 뜨거운 감동을 준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안개 때문에 너무 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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