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을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같은 5층에 사는 제임스 할아버지가 자동 휠체어를 타고 다가왔다. “요즈음 어떠냐?” 제임스의 말에 그는 손을 올려 그저 그렇고 그렇다고 손바닥을 까딱까딱 해보였다. 제임스 할아버지 앞에서는 말 안하고 빨리 피하는게 상책이다. 나이가 90이 가까운 할아버지는 가끔 마주칠 때 마다 자기가 한국 사람인줄 알고 한국에서 50년도에 근무할 때 전쟁고아를 양아들로 삼았던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제 나이가 드니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는데 그 아이 얼굴은 아직도 가물가물 기억난다고 했다.
미국 사람이 한국 단어를 몇마디하고 한국 사정을 알고 있으면 그만큼 한국 사람의 나쁜점을 잘알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그는 웬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제임스 할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아는 사람을 만나 이것 저것 알아봤지만 아직 일거리 맡은 오야지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몇 개월째 빈손이다. 요즈음은 자기가 돈벌이를 못해서 그런지 아내는 평소에도 심한 강짜가 밖을 나가면 술을 먹거나 무조건 사고만 치는 줄 알 고 집에서 못나가게 한다. 그렇다고 집에 있어봤자 좋은 꼴도 없다. 아내는 차 사고로 죽었다는 어머니가 무당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러는지 시간날 때 마다 방에서 새소리나는 휫바람소리를 휘휘불며 땅콩만 까먹는다. 그러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시비를 건다. “대학 나왔다는 말만 하면 다야? 졸업장을 누가 봤어?” 또 왜 이러나? 하긴 그가 아내를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어디나 다 있는 호남향우회니 해병전우회 고대동창회 가운데 적어도 어느 한곳만 끼어도 일년에 한두번 부부동반으로 자랑스럽게 외출하는 기회도 있으련만 그는 안타깝게도 그 세곳에 아무관계도 없었다. 미국에서 회원끼리 모이는 인맥이 없으면 좀 외롭다.
그는 일꺼리를 찾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으면서 어릴 때 같이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하고 속으로 나지막히 떠오르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어릴 때 같이 놀던 다정한 친구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 형들의 얘기를 들으면 전쟁때 미군들의 시체속을 휘젖고 다니며 시계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져 돈을 많이 챙겼다는 것을 어렴풋히 알 수 있었지만 그 무렵 운동장에서 북한과 정전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리치던 장면이 그가 누나와 헤어진 마지막 날이었다. 언젠가 제임스 할아버지가 자신이 겪은 전쟁 얘기를 했다. “아주 처참했어. 달도 없이 캄캄한 어두운 밤에 괴뢰군들과 육탄전을 벌일때는 무조건 서로 머리를 만져보고 머리를 빡빡 깍았으면 괴뢰군 놈이니까 서로 붙잡고 먼저 죽이려고 막 뒹굴었어. 그날 밤에 같이 작전을 했던 한국 중대가 있었는데 어느 한 신병이 손으로 재빨리 만져보니 머리를 빡빡 깍았드래. 그래서 그놈을 먼저 총구에 거는 단도칼로 찔러죽이고 아침에 보니 그 죽은 괴뢰군이 바로 자기 형이었드라는 거야.” 말 상대도 없고 외로워서 그렇겠지만 제임스 할아버지가 말해주는 까마득한 그런 얘기는 정말 듣기싫었다.
어쨌던 생각하고 싶지 않는 그 시절을 보내고 그는 살면 살수록 화가나고 가슴이 허전해서 한번은 미국와서 용하다는 철학관까지 찾아갔다. “미신이라고 부정하면 아무 할말없어. 당신은 이름을 잘못지었어. 물론 이름이 좋아도 태어난 시에 따라 운명이 틀리지만 이 이름을 보니 당신은 지금 사는게 제일좋은 때야.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아무리 흔들고 여기저기 바꿔놓아도 바늘이 언제나 북쪽을 향하는 것봐 이상하잖아? 이 세상은 알수없고 신비한 기로 꽉차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아도 그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시대에 무일푼으로 건너온 사람이 그 당시 백만장자가 있었듯이 돈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다. 더러운 놈의 팔자! 자기 같은 놈은 미국이라고 와봤자 먹는것과 잠자리만 조금 틀린다 뿐이지 반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원대하지 않지만 꿈도 있었다. 그러나 그꿈도 생각하면 기억에도 아득한 어머니와 콧물흘리던 어릴때의 아무 계획없는 막연한 그런 꿈이었다.
잊고 싶어서 그는 할 수 있으면 어릴때의 자기 모습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안개처럼 묻어버린 지난날이 가물가물할 정도록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영어는 좀 하니까 외국어 대학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가 자기 아파트로 들어가서 5층 엘리베이트에서 막 나오는데 제임스 할아버지가 휠체어에 탄채 꼼짝 하지않고 복도에 앉아있었다. “아니, 제임스 방에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 있어요?” “휠체어 밧데리가 떨어져서 꼼짝안해. 나 좀 우리방까지 밀어줄래?” 그래서 그가 휠체어를 밀고 제임스 방앞에 와서 키를 받아가지고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방안까지 휠체어를 밀고 들어갔다. 그가 제임스 방안에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그는 인사를 받고 돌아나오면서 무심코 책상위에 놓인 낡은 사진액자를 보았다. 그 사진은 제임스가 군대시절에 찍은 흑백 사진이었는데 군복을 입고 있는 젊은 제임스 옆에 웬 아이가 서 있었다. 그는 사진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뜨겁게 솟구쳐오른 눈물이 눈꺼풀을 한번만 껌벅이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로 동공에 가득히 고였다. 헐렁한 하우스보이 복장을 하고 옆에 서있는 아이는 어릴 때 그 군인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바로 자기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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