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 캘리포니아 노형건 단장 -힙합 뮤지션 제임스 부자
노형건 단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지난 이십몇 년간 한인 음악계 중심에서 활약해 온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 들뜨고 흥분된 모습은 처음 본다. 성악가, 방송인, 지휘자, 오페라 캘리포니아 단장… 이 모든 타이틀에 앞서 그도 한 사람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힙합 리더 ‘프로그레스’(본명 제임스 노)의 아버지 노형건은 지난 연말 LA타임스 캘린더 섹션에 커버스토리로 나온 아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손이 떨리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자식이란 그런 것일까? 노 단장 자신도 1996년 LA타임스 메트로에 커버스토리(다인종 캐스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성공에 관한 특집)로 나온 적이 있지만, 그 때의 감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이 몰려오더란 것이다. 클래식과 힙합, 장르는 다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코리안 아메리칸 음악인으로서 주류신문에 각각 대서특필된 일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4인조 ‘파 이스트 무브먼트’
LA타임스 커버스토리에 실려
주류언론 대서특필 부전자전
몇년 전부터 노형건 단장으로부터 아들이 무슨 음악그룹을 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젊은 아이들 하는 별 대수롭지 않은 밴드인가보다, 그저 그렇게 흘려듣곤 했다. 그런데 그 밴드가 주류음악계에서 뜨는 힙합 쿼텟이 됐음을 이제 LA타임스를 보고서야 알게 됐으니, 가까이서 먼저 격려해 주지 못한 사실이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또 그 정도면 아들 자랑 많이 했을 법도 하건만, 힙합이란 분야가 우리 세대에겐 낯설어서였을까, 오늘까지 참아온 아버지 노 단장에게 부러움과 축하를 한꺼번에 보낸다.
제임스 노는 4인조 힙합그룹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 이하 FM)의 일원이다. 그러나 제임스란 이름은 이 동네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프로그레스’(Prohgress)란 예명으로 통한다. 함께 공연하는 멤버들도 마찬가지여서 ‘제이-스플리프’(J-Spliff)는 코리안 아메리칸 정재원, ‘케브 니시’(Kev Nish)는 중국계·일본계 아메리칸 케빈 니시무라, ‘디제이 버맨’(DJ Virman)은 필리핀 아메리칸으로, FM은 멤버 4명이 모두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힙합 그룹이다.
LA타임스는 지난 12월27일자 마지막 일요판 캘린더 섹션에서 “코리아타운에서부터 태평양을 넘어 ‘파 이스트 무브먼트’와 함께 아시안 아메리칸 힙합이 터져나오다”란 제목의 커버기사로 이 그룹을 소개했다. “흑인 남성 아티스트들의 전유물인 힙합 음악계에서 아시안들은 인정받지 못했으나 코리아타운에서 시작된 FM의 멤버 4명이 이를 바꾸려 하고 있다”고 소개한 이 기사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FM은 홈타운 바닥에서부터 오랜 노력으로 정상에 오른 뮤지션들이라고 치하했다.
FM이 1년 전 음반 ‘애니멀’에 발표한 ‘걸스 온더 댄스 플로어’(Girls on the Dance Floor)는 지난해 여름 라디오 ‘파워 106’의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빌보드 댄스차트 탑 40에 올랐다. 또 ‘라운드 라운드’(Round Round)란 곡은 틴에이저 히트영화 ‘패스트 앤 퓨리어스’에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됐고, TV 드라마 CSI: 마이애미와 VH1의 리얼리티 쇼에도 여러 번 나왔으며, 계속해서 이들의 음악은 여러 영화에 사용될 예정이다.
2005년과 2007년 아시아와 유럽을 돌며 월드 투어를 가졌고, 2008년에는 칸 영화제에 초청돼 주드 로가 참석한 애프터 파티에서 공연하기도 했으며, 지난해 한국의 인기 힙합그룹인 ‘에픽 하이’와 함께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애틀에서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최근에는 레이디 가가와 스팅 등을 전속으로 두고 있는 메이저 음반회사 인터스코프의 체리트리(Cherrytree) 레코즈와 전속계약을 체결, 올해 안으로 이 레이블을 통한 앨범이 나올 예정이다. 레코드 업계의 한 관계자는 “FM의 힙트로니카 사운드는 새롭고 익사이팅하다. 이들은 대단한 작곡가들이다. 인터넷 키드를 포함한 미래의 아이들을 대변하는 음악그룹으로서 거대한 글로벌 잠재성을 가졌다고 본다”고 LA타임스에서 말하고 있다.
웹사이트(fareastmovement.com)에 매일 5,000명이 클릭한다는 FM은 현재 LA와 하시엔다하이츠 2군데 사무실을 내고 이벤트 회사와 퍼블리싱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벤트 회사에서는 공연 유치와 행사 기획, 대기업들과의 협상 및 계약 등을 맡고 있고, 퍼블리싱 컴퍼니에서는 음악의 카피라잇 즉 사용권 업무를 맡고 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들의 법적 내용과 자문은 법학 석사학위를 가진 제임스의 몫이다.
로스쿨 졸업 다재다능한 아들
자선공연·음악교육에도 열심
아시안 청소년들 롤 모델 기대
제임스는 3가 초등학교와 잔버로우스 중학교를 거쳐 퍼시픽 팰리세이즈 하이를 나온 전형적인 ‘LA 보이’다. 클래식 음악가들인 부모 아래서 8년 동안 피아노를 쳤고 바이얼린도 배웠으며, 초등학생 시절 부모가 창단한 오페라 캘리포니아 소년소녀합창단에서 12학년까지 활약하며 “무대에서 공연하는 즐거움, 사람들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끼를 갖추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어려서부터 오페라와 합창 무대 언저리에서 자라며 공연 기획과 제작, 무대의 앞과 뒤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 오늘의 FM을 키운 뒷심이 됐으리라고 우리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UCLA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로욜라 법대에서 공부하던 제임스가 ‘프로그레스’가 된 것은 고교시절 친구들인 제이와 케빈과 어울려 한인타운을 돌아다니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주차장 같은 데서 음악을 틀어놓고 프리스타일 랩을 하다가 심심풀이로 녹음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 호응을 얻으면서 힙합 그룹으로 발전했다.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죠. 6년 동안 고생했어요. 타운의 작은 극장 여기저기서 공연했지만 아시안들이 하는 힙합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공연 중에 야유를 받거나 관객들이 과일을 던지는 일도 겪었으니까요”
2003년 윌셔와 웨스턴, 지금의 오퍼스 식당 자리가 ‘아틀라스’(Atlas)라는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여기서 공연한 것이 큰 전환점이 됐다. 홍보할 방법이 없어서 한 달 동안 셋이 발이 닳도록 전단지를 뿌리며 광고했더니 공연 날 1,200명이 몰려와 소방국에서 출동했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처음 가진 빅쇼였다. 그때 이후 “이거 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들의 마음에 꽂혔다.
그때부터 밑바닥부터, 부지런히, 꾸준하게 뛰었다. 매 공연에 110% 쏟아 부으며 최선을 다했다고 단원들은 입을 모은다. 처음에는 아시안 얼굴을 드러내놓고 공연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룹의 처음 이름이 익명성을 띤 ‘엠시즈 애너니머스’(Emcee’s Anonymous)였던 것도 그 때문. 그러나 2006년 첫 데모 앨범 ‘포크 뮤직’에 수록한 노래 ‘파 이스트 무브먼트’를 그들의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음악은 어느 힙합 그룹의 음악과 같습니다. 그룹 이름에서 이미 아이덴티티를 드러냈기 때문에 노래 속에 아시안적인 것을 넣지는 않아요. 얼굴은 달라도 우리도 모든 사람과 같은 음악과 같은 메시지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겁니다”
노형건씨에 따르면 이들은 소리 내지 않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다. 나성영락교회 등지에서 수차례 자선공연을 갖고 수익금을 나눔선교회 등 커뮤니티 봉사기관에 도네이션했으며 최근에는 비영리재단 ‘4C 더 파워’와 함께 불우아동을 위한 음악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주 만나 이야기하고 조언도 듣는다는 제임스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노 단장 역시 아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자랑스럽고 흐뭇한 표정이다.
“클래식과 힙합은 아주 다르지만, 공연자의 길은 같습니다. 아들이 너무 좋아하고, 열심히 하고, 점점 더 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아시안 아메리칸 2세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숙희 기자>
음악인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아버지와 아들. 노형건(오른쪽)씨와 제임스 노씨는 장르는 다르지만 함께 공연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은호 기자>
독창적인 아시안 아메리칸 힙합 그룹으로 각광 받고 있는 ‘파 이스트 무브먼트’ 왼쪽부터 제이-스플리프(정재원), 프로그레스(제임스 노), 디제이 버맨, 케브 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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