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애나는 1913년 출판된 엘레노어 포터의 소설 속 주인공이다. 이모 집에 얹혀사는 고아소녀 이야기로 아동소설이었지만 곧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모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쁨놀이’를 통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찾아낼 줄 아는 폴리애나의 본질에 더 끌린 것은 어쩌면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었을 것이다. 폴리애나 신드롬이 미 전국에 스며들면서 ‘Pollyanna’는 ‘낙천주의자’란 뜻의 보통명사가 되어 사전에까지 올랐다.
어떤 불행 속에서도 기쁨의 씨앗을 볼 수 있는 눈 -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오늘로 한 해가 끝난다. 컴퓨터 대란 Y2K의 요란한 경고를 무사히 넘기며 개막되었던 밀레니엄 2000년대의 첫 10년도 막을 내린다. 달력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일까 싶을 만큼 지난 한해는, 지난 10년은 암울했고 힘들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두 가지가 우리의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2001년 테러공격으로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고층빌딩이 붕괴하면서 우리 일상의 안전도 함께 무너졌다.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관공서 건물 앞에 콘크리트 방벽이 세워지고 쇼핑몰과 스태디엄, 도서관과 공항, 어디에서건 신발을 벗고 몸수색을 당하는 굴욕을 기꺼이 감수해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신발폭탄에서 속옷폭탄으로 진화해온 테러기도가 2009년의 마지막 길목을 장식했다.
2008년 부의 상징 월스트릿이 무너지면서 함께 뿌리 뽑힌 것은 소시민의 생계였다. 무풍지대는 없었다. ‘돈더미 속에서 헤엄치던’ 엘리트들의 별세계는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 구경조차 못했던 서민들은 열심히 일해 그들을 구제할 세금을 내야했다. 믿었던 집값은 폭락했고 은퇴투자는 휴지로 변했으며 실업률은 반세기만에 최고로 치솟았고 감원을 면한 직장인들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감봉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테러의 보복으로 시작된 두 개의 전쟁은 9,450억 달러의 돈과 5,300여명의 생명(미군 사망자 수다. 아프간과 이라크인 사망자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을 삼켜버렸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전쟁 자체만이 아니었다. 개인의 권리를 명시한 미국의 헌법위에 군림하며 전범들에 무자비한 고문을 가한 부시의 테러정책은 아직도 뜨거운 논쟁의 화두로 남아있고 국제사회가 미국에 등 돌리는 빌미가 되었다.
10년의 악몽을 꼽자면 한참 더 남았다 : 무능한 대응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운 허리케인 카트리나, 한인대학생 조승희의 무차별 총기난사, 버나드 메이도프의 600억달러 폰지사기, GM과 크라이슬러의 파산, 파산을 향해 치달았던 캘리포니아의 재정난과 극빈층의 웰페어 삭감, 그리고 타이거 우즈의 ‘일탈’…
누구라도 지나간 10년의 페이지는 이제 그만 덮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악몽의 사이사이 좋은 일들도 적지 않았다.
2000년대 ‘빛’의 상징 중 하나는 단연 오바마다. 2008년 대선은 테러에 저당 잡힌 미국의 가치관과 월스트릿 탐욕의 댓가를 호되게 뒤집어쓴 서민의 생계 등 부시 8년에 대한 국민의 신임투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생전에 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백인과 한 테이블에서 점심조차 먹을 수 없었던 흑인 아버지의 아들,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첫 히스패닉계 여성 연방대법관 탄생 역시 소수계에게 희망을 더해 주었다.
테크놀로지의 만개도 눈부셨다 : 2003년엔 마이스페이스가 시작되었고 2005년엔 유튜브가, 2006년엔 트위터가 선보였으며 2007년엔 아이폰과 킨들도 소개되었다. 달의 표면에서 물을 발견했고 맹인에게 빛을 보게 할 인공망막도 개발되었다.
모든 새해는 예외 없이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된다 - 희망과 변화다. 특히 오바마와 함께 열었던 2009년이 그랬다. 그에게 우린 많은 꿈을 걸었었다.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기를, 헬스케어 개혁안만이 아니라 이민개혁안도 성사시키기를, 전쟁을 끝내고 뜨거워지는 지구를 식혀주기를, 진보 대 보수의 이념보다 민생의 이슈를 먼저 보기를…
이쯤에서 ‘폴리애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린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을 듯하다. 아직 체감은 한겨울이어도 각종 경기예측은 봄바람처럼 감미로워졌고 2010년이 시작되면서 헬스케어 개혁안은 틀림없이 입법화 될 것이며 이민개혁안도 상정될 테니까.
아, 컵에 물이 반이나 찼구나, 다짐해도 2010년이 2009년보다 좋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경기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지구가 더 뜨거워질 지도 모른다. 무엇에서나 기쁨을 찾자고 한 것은 폴리애나 만이 아니다. 현명한 대통령 링컨도 늘 말했다. “불행을 예상하면 불행해집니다”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 달력을 펼친다. 깨끗한 하얀 얼굴이다. 이루지 못한 목표도, 부서진 꿈도 아직은 없다. 내년 이맘때 어떤 상처와 좌절로 얼룩져 있을 지 알 수 없지만 새해, 새로운 10년을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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