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수소문 끝에 찾았으나 교도소 수감 중
추방 위기 막으려 백방 노력 끝 석방
한인목사가 7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의동생과 20년만에 감격의 재회를 했다. 하지만 목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다 13세 때 미국으로 입양된 의동생은 마약 관련으로 연방교도소에 수감돼 있었고, 영주권자여서 국외추방대상이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목사는 동생의 추방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엘리콧시티 소재 기쁨의 교회최한용 목사가 윌리엄 엄씨(37)를 처음 만난 것은 14세 때. 당시 평택에 있던 최 목사의 집에 모친 고부례 여사(84)가 생후 3주의 엄씨를 데려왔다. 고 여사는 인근 K-6 험프리 미군기지의 미군들과 기지촌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고, 최 목사 집에는 늘 2-3명의 아동들이 있었다. 최 목사와 엄씨는 친동기처럼 가깝게 지냈다.
생부 바비 허킨슨은 엄씨의 모친이 임신 8개월 때 나중에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한 후 소식이 끊겼고, 모친도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아니었다.
엄씨는 남과 다른 외모로 인해 학교에서 늘 친구들의 놀림 대상이었다. 새 신발과 좋은 신발을 다른 아이들에게 뺏기기 일쑤여서, 최 목사가 부친 자격으로 선생들을 만나 특별당부를 해야 했다.
엄씨는 착하고 얌전하며 주일학교에도 열심이었다. 최 목사는 엄씨가 다니던 교회에 그의 소식을 전했을 때 모든 신자들이 울면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전했다.
엄씨가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 최 목사는 미공군첩보대 요원으로 미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 난 자녀들을 담당하던 윌리엄 벌레슨에게 후원자로 엄씨를 미국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엄씨는 1985년 10월 도미 후 1-2년 가량 최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했으나 이후 연락이 끊겼다. 엄씨는 버지니아 노폭 인근 포쿼슨 벌레슨의 집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올드 도미니언대에 진학했으며, 1학년을 마친 뒤 1991년 4월 미해병대에 입대, 1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맥도날드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그는 2001년 마약 관련으로 8년 6개월 형을 받고, 오하이오 엘크톤의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다.
엄씨의 미국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미숙한 영어와 낯선 문화에 힘들어 하던 어린 엄씨에게 벌레슨은 주말마다 차로 3시간 떨어진 곳에 자신의 새 집을 짓는 일을 돕도록 했다.
최 목사는 1997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오자마자 엄씨를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 포쿼슨에 두 차례나 갔으나 이사 갔다는 말만 들었고, 가까스로 버지니아 로녹 인근 이글락으로 이주했다는 정보를 얻어 찾아갔다. 그곳은 도로가 포장도 돼있지 않은 깊은 시골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벌레슨 부부도 엄씨의 소식을 몰랐다. 엄씨는 18세 이후 벌레슨 집을 나와 독립했다. 나중에 벌레슨이 엄씨가 교도소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알려줬고, 이때부터 최목사는 버지니아 일원의 교도소를 샅샅이 뒤지며 엄씨를 찾았으나 허사였다. 최 목사는 다시 인터넷을 통해 연방교도소 재소자를 검색한 끝에 2005년 엄씨의 소재를 발견했다.
최 목사와 엄씨는 20년 만에 교도소에서 재회하게 되자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동안 목 놓아 울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영주권자인 엄씨가 추방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안 최 목사는 다시 엄씨 구원운동을 시작했다. 엄씨는 지난해 10월말 만기와 함께 텍사스 달라스의 이민구치소로 이감됐다.
최 목사는 아무런 연고가 없을 뿐더러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한국에 그를 보낼 수 없었다. 연방법은 해외에서 출생한 모든 미국인 자녀들을 본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하기에, 생부만 찾으면 쉽게 미국인 신분을 취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생부는 1970-1972년 군 복무 기록만 있을 뿐 다른 기록이 일체 없었다. 다행히 한국대사관에서 엄씨에게 한국여권 발급을 거부해 당장 추방되는 것은 피했고, 최 목사는 각계에 탄원서를 보내 그의 추방을 저지했다.
최 목사는 편지로 판사에게 엄씨의 딱한 사연을 전했다. “그의 인생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혼혈인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에서는 새로운 삶의 적응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외로움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댔다고 했습니다. 그의 지금까지의 삶은 본인이 원하지 않은, 행복하지 않고 굴곡있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과 그 행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구합니다.”
편지가 판사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지난 9월 마지막 재판에서 석방 결정이 내려졌다.
엄씨의 추방 재판을 도운 안일송 변호사는 “엄씨는 미국인으로 미국시민이 돼야할 사람”이라며 “아직 판사의 판결문을 보지 못해 정확하게 엄씨의 체류신분을 알 수 없지만, 추방은 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소한 엄씨는 벨에어 소재 최 목사 자택에 기거하며 신학대에 다닐 계획이다.
엄씨는 “형을 만날 수 있게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다”며 “신학대를 마치면 같은 혼혈인이나 어두운 전력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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