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별의 날이 왔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던가. 그러나 남자는 그렇게도 원하는 영주권을 여자손에서 받는 순간 분명히 고맙다고 말을해야 되는데도 갑자기 입이 얼어붙은 듯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축하해요. 여자는 자기 이름 앞으로 우편소인이 찍힌 봉투채 내밀며 밝게 웃었다. 우라질놈의 영주권. 그는 남모르게 고생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그것을 보자 코끝이 찡했다.
남자는 꼭 2년 반동안 여자 집에 살았다. 사용하는 방만 달랐을 뿐 이집 아들 열살짜리 민우가 남자를 무던히 따랐기 때문에 거의 식구처럼 어울려 지냈다. 남자가 집으로 오는길에 혹시 마주치면 아이는 아저씨! 하고 반갑게 소리치며 그의 무릎사이로 뛰어들었고 짜장면 집에서 자기 엄마를 제치고 더 먹겠다고 거침없이 남자 짜장면 그릇에 수저를 집어 넣었다. 동네 조그마한 한국 식품점에서 캐쉬어로 일하는 여자는 민우 아버지가 전도사로 미국에 온 이듬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민우는 가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아저씨 얼굴을 그리겠다고 이리저리 얼굴을 지멋대로 밀고 당기고 하더니 저녁먹고 몇 시간을 꼼짝않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그림 그리기 전에 칼로 연필깍이를 한없이 계속하면 “또 부인생각이세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칼로 연필을 깍으면 아사한 나무 냄새가 나고 남자는 그 나무 냄새가 너무 좋았다. 연필을 깍으면 고향집의 마누라와 민우보다 한 살 많은 아들 생각이 나고 그래서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연필 한 자루 심이 고스란히 남을 때 까지 쉬임없이 깍고 또 깍았다.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못한 양복쟁이가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잘 그리겠는가 마는 남자는 그래도 혼자서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번은 아이가 “아저씨 다정한 얼굴은 어떻게 그려요?” 하고 물었다. 다정한 얼굴?! “우리 엄마가 아저씨 눈은 다정하대요.” 어디 너 그림 한번 보자고 했더니 나중에 보여 드릴께요 하면서 어떻게 그렸는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날은 아이가 밤에 자다말고 그의 방에 와서 아저씨하고 같이 자고 싶다면서 밤새도록 그를 꼭 끌어안고 잤는데 다음날 엄마한테 혼났는지 그를 보더니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여자는 그런 자기 아들을 보고 애가 저래요 하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소리없이 웃었다.
남자는 하루하루 간다고 벼르던 날짜가 열흘을 훌쩍넘자 그제야 결정을 했다. 그동안 너무 정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예정된 약속이었다. 그날 저녁 남자는 민우를 데리고 평소 적적할 때 혼자 잘 나가던 그 장소로 갔다. 맞은편 하이웨이 길위로 대형 트럭들이 밝은 불을 비추고 빠르게 달려갔다. “민우는 커서 뭐될래?” “저요? 아저씨 아들요.” 뭐라고? 아이의 황당한 말에 그는 평소 아이한테 했던 다른 말을 물었다. “남자는?” “절대 울지 않는다.” “그래, 남자놈이 우는 것은 정말 보기싫은 거야. 속으로 울지 눈물을 보이면 않되는게 남자야. 민우는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지금 그렇게하고 있어요.” 민우는 자랑스럽게 그렇게 말해놓고 남자손을 두손으로 꼭 잡았다.
아이한테 자기가 간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저 많은차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걸까? 갈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남자는 그동안 확실히 갈곳을 정하지 못하고 막연히 생각하다가 결국 뉴욕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베이에리아쪽은 쟙이 없어서 그런지 신규 이민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다. 뉴욕에 있는 친구는 전화할 때 마다 거기는 한국사람들이 많고 한국가게도 많기 때문에 일류 테일러 기술을 가진 사람은 골라잡기로 수입좋은 세탁소를 쵸이스 한다고 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남자는 잠결에 흐느껴 우는 자기 울음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자기가 아니라 뒷마당에서 기도하는 바로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며칠째 가늘게 들리던 말소리가 그제야 확실하게 그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고마운 사람. 그의 앞날을 부탁하는 여자의 간절한 기도는 새벽녁까지 계속되었다.
밤새 이슬비가 내렸는지 처마끝에 작은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민우야 아저씨 간다.” 여자가 옆에 붙어서 있는 아이를 보고 그렇게 말하자 아이가 자기 엄마를 한번 보더니 등뒤로 감추고 있던 그림을 불쑥 내밀었다. 남자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아! 하고 입을 벌린채 다물지 못했다.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수없이 덧칠을 한 그 얼굴은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어린 고사리 손이 서툴게 그린 말할 수 없이 정성어린 그림이었다. “이거 나줄래?” “안돼요. 우리방에 걸어놓을 거예요.” 그때까지 욱,욱 목구멍으로 울음참는 소리를 내던 아이가 기여히 왕,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가지마!”
그는 매달리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민우야 미안하다. 남자는?” “싫어요! 아저씨 가지마!” 아이는 더 섧게 울다가 엄마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몸을 흔들며 마구 울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가 여자를 향해 인사를 하자 여자가 눈시울 가득히 붉게 물든 눈으로 얼른 등을 돌렸다.
그는 걸어가면서 자신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절대 뒤돌아 보면 않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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