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지휘계에 LA 필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두다멜이 약관 28세에 LA 필의 상임지휘자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다멜은 개천에서 용난 정도가 아니라 시궁창 속에서 용난 지휘자로 꼽히고 있다. 두다멜은 클래식계의 촌 동네 베네주엘라에서 마약에 물든 청소년들을 바르게 이끌자는 구호 아래 탄생한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맡아 이를 세계에 알리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나이를 초월한 지휘 능력, 그리고 2004년 뱀버거에서 열린 말러 지휘자 콩쿨에서 1등한 것을 계기로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고, 이후 어쩐일인지 상상을 초월한 대중적 인기몰이를 하며 LA필이 망설임 없이 셀로넨의 후임으로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두다멜의 LA필 취임 연주 실황이 얼마 전 TV(PBS)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는 데 두다멜의 등장이 헐리웃 판 상술의 소산인지 어쩐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아무튼 클래식계는 두다멜의 행보에 의아한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며 그의 연주 실황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취임연주회에서 두다멜이 보여준 ‘말러(거인 교향곡)’의 연주는 일부 평론가들이 ‘취객의 춤’같다고 혹평할 만큼 다소 내용이 빠진 연주였다. LA 필측은 두다멜의 나이에 비하면 그정도도 대단하다고 애써 얼버무리고 있지만 앞으로 두다멜이 평론가들의 예리한 시선을 피해 가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다. 물론 평론가들이 두다멜의 능력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그에게 맡은 바 임무(?)가 따로 있고 또 앞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신천지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다만 이번 연주만을 놓고 평가 하자면 LA 필은 하나(상품)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스타와 영웅은 다르다. 반짝하다 사라지는 스타는 있어도 반짝하다 사라지는 영웅은 없기 때문이다. 클래식(고전음악)은 그 지향하는 바, 무겁고도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다. 반짝하다 사라지는 스타(대중 음악)는 있을 수 있어도 영원히 사장되는 위대한 음악은 있을 수 없다. 클래식이 몇몇 소수를 위한 귀족의 예술이라는 주장은 꼭 맞는 말은 아닐지 몰라도 소수의 이해 속에서 지켜진다는 점에서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셸(1897-1970)은 별볼일 없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이끈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였다. 그는 압도적인 지휘솜씨로 인기를 끌었지만 결코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지휘 스타일로 더욱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위대한 음반을 남겼지만 카라얀 처럼상업주의는 아니었다. 그 역시 지독한 클래식주의자였지만 첼리 비다케처럼 녹음조차 거부할 만큼 고집스럽지는 않았고, 정확하고 최상의 선율을 지향했으면서도 토스카니니처럼 단원들을 쥐어짜는 독재자로 군림하지도 않았다. 푸르트벵글러 처럼 베토벤(교향곡)에서는 위대한 사운드를 들려주지 못했지만 몰다우(스메타나 곡)와 같은 소품에서 조차 위대한 오케스트라 정신이 살아 있었던, 셸이야말로 음악에서의 진정한 장인이었다.
스타의식을 가진 지휘자가 꼭 위대한 지휘자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카라얀과 첼리 비다케의 싸움이다. 베를린 필의 카라얀과 뮌헨 필의 첼리 비다케는 상반된 지휘관으로 평생 앙숙으로 지냈는 데, 이는 호화판 스포트라잇을 받으며 수많은 음반을 남겼던 카라얀과는 달리 첼리 비타케는 음반녹음은 클래식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둘의 상반된 예술관은 베를린 필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로 이끌었고 음악(예술)이 상업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싸움은 현재까지도 화두로 이어지고 있다.
스타 지휘자 두다멜의 행보가 클래식계에 자극제가 될지 독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특히 그의 말러에 대한 이해는 천재적인 직관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피상적이고 넌센스가 과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말러(1860-1911)는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요즘에 일고 있는 세계적인 말러 붐은 세계 지휘계를 석권하고 있는 유태계 지휘자들의 선전 덕분이다. 말러는 분명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그처럼 열광할 만큼 위대한 작곡가인가 하는 점은 한번 숙고해 볼 일이다. 말러는 원래 유태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가 유태교보다 믿을 만한 종교여서가 아니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점은 알만한 사람(비평가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현실주의, 이것은 아마 약싹빠른 유태인들의 수천년간 방랑생활로 터득한 본능일런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유태인이라는 열등의식은 말러의 예술을 지배하는 모티브 중의 하나였고 그것은 가족의 유전적 질병도 작용했다. 말러의 가족에게 있던 치명적인 심장병은 말러가 일찍 죽는(51세) 원인이 되기도 했는 데 그의 형제중 살아 남은 사람은 말러가 유일했다고 한다. 그의 딸도 5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같은 질환)했고 이로인한 말러의 슬픔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 바 있었다. 그가 ‘거인’이나 ‘부활’같은 거창한 교향곡에 집착한 것도 이러한 슬픔, 불안감의 결과였다.
슬픔이 깃든 미소라고나할까, 두다멜이 과연 말러가 주는 반전의 감동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말러와 닮은 점은 졸지에 유명해졌다는 점 밖에는 없었다. 한의 승화, 내면의 강렬함이 빠진 두다멜의 연주는 젊은이의 치기, 무조건적인 몰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거인(교향곡)에 가려진 또다른 일면은 단순한 천재 두다멜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거창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다멜의 행보는 앞으로도 클래식계의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두다멜이 진정한 거인으로 거듭날지, 반짝 비치다가 작은 거인으로 사라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두다멜은 내년 5월 LA필을 이끌고 SF 데이비스 심포니 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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