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밤에 관계를 갖고 싶을 때 마다 빨간 빤스를 쏙 까내보이며 여보 이것봐라, 하고 길게 발음한다. 나는 그 뜻을 알기 때문에 “자야, 알았어 나중에 보자.” 아내 이름은 성자고 나는 그냥 자야라고 부른다. 아내는 섭섭한 눈으로 눈을 한번 흘기며 “나중에 보자고 해놓고 한번도 해주지 않드라.” 내가 정말 그랬나?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좀 조져줄 생각으로 침대로 끌고가 덮치면 “아니, 떡치듯이 그렇게 하면 어떡해? 우리 전 남편은 그렇게 않했어. 살살해.” 아이구, 전 남편 들먹이니 오늘도 글렀다. 나는 아내가 전 남편이 어떻고 하면 그만 있던 흥도 다 꺼져버린다. 전 남편은 말자지만하고 그 자리에서 두번 세번 했다느니 당신처럼 안하고 이렇게 했다느니 그러나 단 한가지 꼭 같은 점은 클라이맥스때 숨 넘어가는 소리는 똑같단다.
아내는 버릇처럼 “여보 나 사랑하는 거지?”하고 자주 묻는다. 사랑? 정말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 문제를 한번도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럼.” 하고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않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본 마누라야.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다고 맹세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야지. 남자의 도리가 바로 그런게 아닌가.
아내와 둘이 이렇게 산 것은 거의 일년쯤 되었다. 어느날 밤에 벼르고 벼르다 왔다면서 여자가 난데없이 불쑥 집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읍소하듯이 간절하게 말했다. 우리 같이 살자. 나는 잠시 함께 사는 여자지만 내가 맞이한 사람, 그래도 대접해 주고 싶어 교회나 남들 앞에서 분명히 아내라고 소개했다. 아내는 그것을 그럴수 없이 고마워했다. 아내는 언제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참 질좋은 여자다. 그리고 이 여자는 밤마다 빼놓지 않고 내가 잠들떄까지 오만가지 얘기를 살살 다 들려준다. 장화홍련 숙영낭자전 심청전이며 내가 모두 알고 있는 옛날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소근소근 들려주는 소리에 나는 잠이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귀여운 갓난애기한테 하듯이 내 배꼽에 입김을 훅 불꼬 뽕! 소리를 낸다. 나도 참으로 정이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가 언감생심 나한테 끝까지 정을 품으면 안되겠다 싶어 일부러 쌀쌀하게 대했다. 내가 처음부터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별의 시간을 아내도 알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처신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마누라가 한국에서 온다는 기별이 왔고 나는 어느날 아쉽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고백했다. “언제와?” “내일 모레.” 둘이서 아무말도 없이 한참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다급하니까 본토발음이 나왔다. “못 잊겠네 못 잊겠네.” 유행가처럼 그 말을 되풀이 하며 아내는 물잔이 놓였던 물자국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만 자꾸 그렸다. 동그라미 물방울이 자꾸 불어 끊임없이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문득 쳐다보니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은 하지않고 자꾸 그 눈물을 찍어 동그라미만 그리고 있었다. 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다음에 결혼하면 이런 여자하고 해야지 참 놓치기 싫은 여자였다.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나는 그동안 한시간이나 기다린 셈이었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저만치 마누라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보!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정겨운 말이었다. “어마, 너 성자 아니니?” 마누라가 갑자기 내 앞에 오더니 뒤를 보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아내가 나 몰래 여기까지 왔나? 내가 흘깃 뒤돌아 보니 정말 그 여자가 두어발 등뒤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얘, 너 성자 맞지? 오랜만이다 얘.” 마누라 말에 아내는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쌀쌀하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어마 쟤봐라 쟤가 왜저래?” 아는 사람이야? 하고 내가 물었다. “어마, 내가 당신한테 몇번이나 말했잖아? 약혼한 남자가 죽었다고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산 애야.” “약혼한 남자가 죽었다고?” “그래. 평생 독수공방 지키고 산 수녀 같은 애야. 우리오빠가 그렇게 쫓아다녀도 도도하게 눈한번 안주더니 미국에는 언제왔지? 참 불쌍한 앤데.”
나는 문득 못잊겠네, 하고 애처롭게 울던 모습이 떠올라 잠깐, 나 변소부터 갔다올께 하고 급하다는 듯이 말하고는 그여자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모퉁이 벽 앞에 그 여자가 눈을 꼭감고 울고 있었다. 자야!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여자가 황급히 말했다. “미안해. 말 안하고 몰래나와서. 나 내일 비행기 타고 다른 곳으로 가. 당신 위신 지켜줘야지. 내가 옆에 있으면 안되잖아. 그래서 멀리 가기로 비행기 표 예약해 놓았어.” 나는 그말이 너무 고맙고 전 남편이 어떻게 했다는 평소하던 거짓말이 새삼스레 안타까워 수첩에 끼워두었던 공수표를 거냈었다. 내가 싸인을 하고 주자 “당신 이렇게 돈이 많았어? 하고 여자가 놀라며 물었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일도 했지만 복권에 2등으로 당첨된 돈까지 합쳐 웬만한 가게는 충분히 차릴 수 있는 액수였다. “우리는 두사람이잖아. 마누라하고 다시 시작하면 돼. 당신 혼자 살면서 돈이라도 있어야지.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어서 가봐.” 그것은 내 마음 진심이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마누라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한국에서 전화걸어 변호사 미리 선정해 놓았어. 한 두시간이면 다 끝나잖아. 내 말 무슨 뜻인줄 알겠지?” 아... 아파트 팔아 사채놀이하고 버젓히 딴살림 차리고 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나는 돌아서서 죽자구 뛰어갔다. 기다려! 이제 우리는 합법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믿었던 내가 잘못이다. 여기서 못 찾으면 문패도 번짓수도 없는데 끝이다. 제발 기다려! 나는 조금전에 여자가 사라진 쪽으로 거의 쓰러질듯이 숨을 헐덕이며 정신없이 뛰어갔다. 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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