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쯤 되었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깊은 겨울! 창을 때리는 세찬 바람소리가 한 밤중에 고요를 깨트리는가 하였더니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남편은 서울 신문사의 편집국 직원으로 있었었는데 숙직을 하는 날이라 집을 비었고 세 살 난 아들은 내 품에 안기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생살을 후벼대는 것 같은 진통이 자주 이어졌다.
한 밤중이어서 시어른들에게, 남편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둘째 출산이어서 마음을 다스리고 혼자 힘으로 출산을 해보려 였었으나 그래도 몸이 떨려오는 공포에 담을 같이하고 살고 있던 친정언니를 불러 아들을 부탁하고 캄캄한 이른 새벽에 두툼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산부인과를 찾아 병실로 안내를 받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언니의 전화를 받고 시가족들을 앞세우고 달려온 남편이 나의 불룩 배를 쓰다듬으면서 “공주님! 어서 이리로 납시옵소서.. 하고 허리를 굽히며 큰 절을 하는 것 이었다. 임신초기부터 시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꼭 딸을 낳아야 된 다고들 만 했다.
남편은 잠시라도 나를 위로 해보려는 배려였었지만 내게는 고통의 신음소리만 높아 갈 뿐이었다.
차라리 남편이 ‘아들이던, 딸이던 순산만 하라고.’ 만 했다면 작은 위로라도 되었을 것을…….
“아가야! 제발 딸을 낳아주렴” 되풀이 되는 시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시어머님은 아들 육남매에 딸 한분을 두셨는데 첫째도 둘째 며느리인 나도 도 또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며느리까지 손자만을 두시어 손녀를 목마르게 기다리신 것 같았다.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찌 그것이 인력으로 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딸 보다는 아들을 바라는 부권사회인데 유독 시가에서는 손녀를 바라는 것에 이해가 되긴 했었지만 내심 ‘또 아들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정신적인 압박은 떨칠 수가 없었다.
10시간이 넘는 오랜 진통 끝에 이윽고 아기가 세상을 향하여 응아! 하고 첫 울음을 터트렸다.
“딸이다. 딸이다!”.
기쁨에 넘쳐흐르는 벅찬 환성이 환청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아가야 네가 나의 소원을 풀어주었구나”
“여보 고마워. 딸을 낳아주어서”
”올케 고마워요.”
모두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맙다고 건네주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켜 간호사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가 딸임을 확인하곤 후우! 하고 안도의 긴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나도 모를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열 달 동안 을 ‘딸을 꼭 낳아야 한다고 하는 잠재된 의식에 있던 천근같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다는 해방감!
예쁜 공주가 태어났다고 친정식구들은 물론, 온 동네가 축제의 분위기였다.
딸은 시가어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예쁘게 잘 자라주었다.
딸의 이름을 성스러운 은혜를 입으며 자라라고 ‘성은’이라고 지었다.
성은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서였다. 선생님들은 딸이 인형처럼 예쁘다고 영화감독을 소개 시켜 줄 테니 아역배우를 시키라고들 하면서 ‘성은’인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하고 물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딸은 “미코리가 되어 좋은 엄마가 될래요. 라고 같은 대답을 되풀이 하곤 했다.
엄마인 나도 ‘미코리’의 뜻을 몰랐었는데 선생님이 ‘미코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여자인 ‘미코리’가 텔레비에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마도 내 딸 성은이는 어릴 때부터 미스 코리아가 되고 싶은 야무진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 같다.
‘미스 코리아!’ 그 어린나이에 감히 미스코리아를 꿈꾸다니?
자라면서 주위사람들은 은연중 성은이를 장래 ‘미스 코리아’ 감이라고 성은이의 꿈을 부채질했다.
성은이는 외모 보다는 마음이 착해 속이 깊어 배려가 많았고 구진 일에도 앞 장을 서 곤했다. 그 덕에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 최우수 모범상을 받는 등, 성적도 우수했다.
성은이가 중학교 2학년에 들어설 무렵,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답시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시동생의 초청을 받아 이민의 첫 발을 드려놓았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영화로만 보아오던 화려한 천국은 아니었다.
살아 갈수록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높아만 갔고 두 다리를 딛고설 땅이 없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고 하는 목적은 한 낫 언어의 유희며 사치스러운 망각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다행하게도 우리부부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전자회사에 소개를 받고 남편은 밤일, 나는 낮일로, 또 다른 일을 찾아 생활전선에 투사가 되어 어린 성은이를 돌보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대도 성은이는 단 한 번의 투정도 없이 그 여린 손으로 빨래도 하며 저녁상을 차려놓고 아빠 엄마를 맞곤 했다.
“성은아! 엄마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 입에서는 언제나 낡은 녹음테이프 가 돌아가듯 같은 말만 되풀이 되곤 했다. 비수로 갈기 길기 가슴을 도려낸다 한들, 모진 생활에 시달렸던 그때의 절규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가?
이 아픔은 아마도 대부분의 이민 일세들이 치러야 했던 역사의 한 장이였으리라.
그 와중에 서도 성은이는 쉽게 미국생활에 적응하여갔다. 특히 학교나 교회서도 예쁘고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티 없이 ‘우미청아’ 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은이가 고등학교 때였다. 성은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었는데 네 명의 미국인들이 우리 뒤를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등허리가 섬뜩하여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성은이의 앞을 가로막고 ‘자기들은 Charm School 선생들인데 동양인 Model을 찾고 있던 중, 당신들의 미모가 아름다워서 라고 하며 채널투어(Fashion Model are Followed by Television Cameras)에 나가지 않겠느냐’ 고 적극적인 권유를 해 오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은이가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바다의 여신‘이라는 미녀로 발탁되었던 경험이 있었던 탓인지 쉽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그 덕에 꿈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화려한 무대의상을 걸치고 눈부신 Spotlight를 받으며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Model 생활도 해보았다. 실로 가슴 설레는 영광? 을 안았었고 우리나라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여서 더더욱 부듯했고 자랑스러웠다.
이 기사가 미국 방송을 통하여 주류사회와 한국일보에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해마다 한국일보 주최로 열리는 미인대회에 참석 할 것을 권유해 왔었다. 성은이는 자신이 없다고 적지 아니 망설이면서도 용감하게 출전을 했다.
하늘의 도움이시었던가? 성은이는 ‘眞’이라는 영광의 월계관을 안았다. 꿈만 같았다. 성은이가 어릴 때 다져온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마웠다. 감격에 찬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 때의 그 황홀함과 가슴 벅찼던 행복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약동하고 있다.
본선출전을 위하여 각 지역에서 모여든 미인들과 합숙할 때었다.
모모 군부로 부터 미스 코리아 대표로 상표를 전달 받고 본선 출전에는 무난히 통과 할 것이 라는 설렘에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런데 아쉽게도 본선에서 진. 선. 미. 의 찬란했었던 꿈은 사라지고 다행하게도 우정 상을 받아 가족들에게는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어린 성은이가 혹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성은이가 오히려 나 괜찮다”고 하면서 나의 등을 도닥거리며 위안을 주었다. 고마워 또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 졌었다.
그 다음날이었다.
이름난 재벌 아들들이 마담뚜를 앞세워 청혼이 연달아 이어졌다.
심지어 총각의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모 기업의 재벌은 약혼을 미끼로 센 푸란시스코나 산호세나 딸이 원하는 곳에 대형 골프장을 지어주고 대학원을 졸업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호언장담도 했고 또 영화사에서도 주인공을 시켜 일약 탑 스타로 만들어 주겠다고 계약서까지 들고 오기도 했다.
남편은 영화배우 보다는 재벌 며느리가 되는 것이 ‘고생 끝’이라고 하면서 성은이의 마음을 흔들려고 했으나 나는 심심치 않게 신문에 도배되는 재발가의 며느리와 영화배우들의 비운을 성은 이에게 겪게 할 수 없어 그 모든 일들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성은이도 침묵으로 나의 뜻을 묵묵히 받아드렸다. 정 말 고마웠다.
한참 그 또래의 나이들!, 명품으로 몸을 감싸고 사치하고 싶은 허영심이 누군들 없겠는가? 장래야 어떻게 되던, 공주처럼 부귀영화를 누 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사리판단을 할 만큼 반듯하게 자라주어 나의 뜻에 따라준 내 딸 성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가정의 울 타리를 지키며 출 퇴근 시간을 맞추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근면한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다.
‘미코리’ 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웠던 성은이가 아직도 내 눈에는 어제인 것 같은데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직장으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쳇바퀴 돌듯이 돌아다니는 성은 이를 보고 남편은 아무도 모를 가는 숨을 내 쉬기도 했지만 ‘초년고생은 돈을 주고도 사라’는 말처럼 땀 흘려 이룩한 노력의 대가야 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성은의 등을 다독거리면서도 미안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는다.
두 손자를 돌보고 있다.
검약과 검소로 삶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성은 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런데 이젠 그 손자들이 나에게는 다시없는 반야의 마루턱에 걸터앉은 나에게 큰 버팀 몫이 되어주는 고마움마저 안겨주고 있다.
“성은아!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네가 어릴 때 ‘미코리’의 꿈을 다져가 그 꿈을 이루듯이 너의 후손에게도 원대한 꿈을 펼치는 굳건한 대륙의 사나이로 키워주려무나. 라고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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