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벨벳 혁명이 일어 난지 몇 달 후 늦은 저녁이었다. 프라하의 웬세스라스 광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같이 가던 체코인 친구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그 친구는 냉정을 찾더니 거리를 가리켰다.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저녁거리 풍경이었다. 몇몇 커플이 산보를 하고 있었고 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관광객들은 거리로 나있는 상점의 쇼 윈도우를 바라보며 걷고 있었고 어디선가 음악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평범한 밤거리 모습이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는 그 광경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시절 해가 지면 웬세스라스 광장에는 인적이 끊겼다고 했다. 비밀경찰과 밀고자들이 득실거리던 그 시절 해만 지면 두문불출하는 것이 상책이었다고 했다.
프라하의 명소인 이 웬세스라스 광장은 밤만 되면 텅 빈 무인(無人)의 공터였다는 것이다. 그 광장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그 광경에 감정이 북 바쳐 올라 잠시 눈물을 흘렸다는 설명이었다.” 보스턴 글로브지의 제프 제이코비의 회고다.
‘무엇이 공산주의를 소멸 시켰나’ ‘왜 장벽은 무너졌나’ ‘냉전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온갖 제목이 난무한다. 베를린장벽 붕괴 20년을 되돌아보는 에세이들이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다. 이 전쟁의 세기는 1914년에 시작돼 1989년에 끝났다. 이 기나긴 전쟁에서 자유진영은 파시즘과 공산체제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승리의 해가 1989년이라는 지적과 함께 일부 학자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베를린장벽 붕괴의 의미를 찾았다.
정치적 해석도 뒤따른다. 베를린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의 승리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분석이 그것이다. 당장의 승리자는 미국이었다. 20년이 지난 후 그 판정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아마도 중국이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닐까 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같은 1989년이었다. 유럽에서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자유화의 요구에 공산체제가 붕괴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가 발생했다.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시위대를 공산당은 탱크로 깔아뭉갰다. 같은 자유화 요구에 대해 유럽과 중국은 전혀 다른 길을 간 것이다.
그리고 20년.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일종의 잡종이라고 할까, 그런 레닌 식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 국가자본주의로 무장한 중국이 수퍼 파워로 발 돋음 하면서 또 다른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을 나눈 ‘동쪽의 장벽’도 베를린장벽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인가.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관련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상황을 그는 비관적으로 보았다. 바로 중국 때문이다.
과거 공산주의의 심장은 모스크바였다. 그 심장부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출현이다. 그 심장부가 변하면서 베를린장벽은 무너졌고 마침내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풀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의 심장은 북경이다. 그 북경이 변하지 않았다. 레닌 식 자본주의로 일종의 전이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공산주의로 남아 있다. 또 한반도의 통일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20년 전 베를린장벽과 한국을 나눈 ‘동쪽의 장벽’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복잡하게 볼 필요가 없다. 인간본성의 궁극적 승리로 보면 된다. 공산주의라는 악의 시스템, 퇴행적 제도에 대한 인간본성의 거부가 가져온 결과가 베를린장벽 붕괴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현대사의 대사건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가 주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체제, 전체주의 폭정체제는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군사적 억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수많은 장벽을 쌓아 사람들의 이동과 표현의 자유를 막아야만 한다. 그런 체제가 바로 전체주의체제로, 공산주의는 그 변형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본성을 억압하는 기형의 전체주의 체제는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소련제국은 베를린장벽 붕괴 2년 후, 그러니까 볼셰비키혁명 73년 만에 멸망했다. 일본군국주의도 70여년 만에 패망했고 나치독일은 더 짧은 세월을 누리다가 소멸했다.
여기서 돌아보게 되는 것이 김정일 체제다. 스탈린식 공산체제라고도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천황(天皇)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본군국주의를 닮았다. 아니, 사이비종교단체를 연상시킨다. 그 극단의 기형적 체제가 60년을 넘겼다. 그 명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왠지 하나의 환상이 눈앞에 너울거리는 느낌이다. 수령절대주의의 우상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환상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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