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편지가 오던날 돈은 만들어야겠고 다급한 마음에 카지노에 갔다가 그 여자를 또 만나게 되었다.
우연인지 블랙잭 테이블에 같이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어렴풋히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여자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지노에서 만난 그렇고 그런 여자. 자기가 제 아무리 판돈을 크게걸고 놀아도 동물적인 본능으로 경계심이 생기면서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한번은 일찍 돈을 잃고 버스가 올때까지 어슬렁 거리는데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남은 시간 좀 해보라면서 돈을 주었다. 나는 버스가 오기 10분전에 그 여자를 찾아가서 4백 70불을 돌려주었다. “어마, 돈 좀 땄어요?”, “아닙니다. 나는 원래 60불 밖에 가져오지 않는데 그 생각을 하고 용케 몇 십불 잃고 나머지 돌려드리는 겁니다.” 그 여자는 내 말에 믿지기 않는다는듯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돈 좀 만져본지가 오래되었다. 일꺼리가 통없고 밥은 먹어야겠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몇번 들락거렸을 뿐이다. 아내가 몇 딸째 송금하지 않는 나를 직접 말하지 못하고 애들을 시켜 안부 형식으로 편지를 보냈다. 미국오던 첫해는 일꺼리가 많았는데 일년전부터 차츰 줄더니 몇 달째 망치한번 들어보지 못했다. 경기가 않좋으니 건축일을 하는 나 같은 노무자들은 딱 밥굶기 좋게 되었다. 그런 판국인데 그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자기집에 식사를 초대하고 싶은데 자기 딸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딸?
“딸 애한테 의사 선생님이라고 했어요.” 나를 의사라고 소개시켜준 것보다 딸이 기다린다는 말에 내키지 않았지만 주소를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 스시초밥을 잔뜩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13살짜리 딸이 눈치를 챘는지 자리를 내주고 나간 사이에 그 여자가 많은 얘기를 했다. 남편이 3년전에 워싱톤 학술세미나에 갔다가 비행기가 불이나서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3년전에 그런 비행기 사고가 있었나? 남편은 천만불 위자료를 받았는데 2년후에 후유증으로 그만 죽고 말았단다.
야, 나는 속으로 졸도할 정도로 놀래면서 그러나 그 많은 돈도 내 주머니 1센트 만도 못하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그냥 그렇게 여겼다. 여자는 내가 정직하고 노동자 스타일이라서 좋다고 했다. “누구나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얼굴과 스타일이 있쟎아요.” 나는 되도록 카지노는 가지 말라고 지나가는 그런말만 하고 돌아왔다. 그런후에 여자쪽에서 몇번 더 만나자는 전화가 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목구멍이 석자라고 아무관심 없었고 죄송하다면서 정중히 사과했다. 두달째 룸메이트 방세도 못냈는데 한가롭게 여자와 밥먹고 할 형편이 못되었다. 미국 경기가 앞으로 반년후에 풀린다해도 나한테는 너무 먼 기간이고 이대로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형편이었다.
그렇게 몇주일이 더 지났나? 어느날 밤에 그여자 딸 아이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빨리 좀 오시라고. 여자는 그동안 아팠는지 살이 조금빠진 얼굴이 반은 웃어면서 그러나 화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미운 사람. 내가 그렇게 전화를 해도 냉담하게 끊더니 왜 왔어요? 저리가요.” 평소 자주 만나는 연인관계도 아닌데 귀여운 투정 같은 여자의 그런말을 들으며 나는 직감적인 심각함을 어렴풋히 느꼈다. 그리고는 잠시후에 여자가 진심어린 얼굴로 심각하게 말했다. “세상사는게 다 그런거잖아요. 저의 간절한 부탁이예요 들어주세요. 그쪽 부인에게 위자료로 백만불 드릴께요. 그렇게 하고 이집에 들어오세요. 그냥 허락해 주세요.”
백만불? 나는 아직까지 1억도 만져보지 못했는데 백만불이면 10억? 나는 너무 갑자기 당하는 뜻밖의 일이라 숨이 턱 막히면서 속이 다 떨렸다. 그래, 나도 이제 고단한 인생 발 좀 펴고 살자. 불체자 신분도 면하고 여유롭게 사는 교포사회의 일원이 되어보자.
나는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여자에게 망서림없이 밝고 환한 웃음을 던졌다. 어려운 결정앞에 곧바로 환하게 웃는 웃음의 어엿한 의미를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달래려고 다음 날 오후 5시쯤 되었나, 집앞을 나서는데 갑자기 십자로 갈라진 길위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강렬한 햇살이 엄청난 빛다발로 쏟아지는 눈부신 광경을 목격했다. 그 빛이 얼마나 눈이 부시고 장엄했어면 그 순간 웬일인지 사람이 이다음 죽어 어느 빛다발과 마주칠 상상할 수 없이 웅대하고 두려운 빛다발이 생각나면서 나는 세상이 아주 조그마하고, 사람사는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참으로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왜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 종교도 없는 놈이.
사람사는게 다 그런거라고 여자가 말했지만 내가 처음부터 여자의 말을 들어면서 속으로 망서릴 이유가 전연 없었기 때문에 빛다발을 보면서 생전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내일 공항으로 가기전에 나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항공티켓을 카피해서 우체통에 집어넣어면 된다.
여보, 나 비행기 탄다. 나까지 그럴수 없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멀리있는 그리운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행복이고 사람들은 그 생각만으로 가슴설레이는 법이다. 그래서 미국와서 처음으로 그렇게 흔하고 싼고기를 먹을 때 가족 생각에 더럽게도 목이메여 눈시울이 화끈거리던 순간처럼 자꾸 목이 젖는다. 에이프릴. 그여자 미국 이름은 내 생일이 첫번째로 들어가는 바로 그 4월이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