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아에서 순식간에 1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의 파고가 캘리포니아 연안까지 밀려오고, 300여명의 사망자를 내며 동남아를 휩쓴 살인태풍이 할퀴고 간 35만 이재민의 참상을 돌 볼 새도 없이,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지진의 사망자는 100명인지 1,000명인지 파악조차 힘든 상황…같은 날 동시다발적으로 지구를 뒤 흔든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한 어제, 두 민주당의원이 연방상원에 기후법안을 제출했다.
한인들에게도 낯익은 바바라 박서 환경위원장과 존 케리 외교위원장, 두 상원의원이 공동작성에 들어가 9개월 동안 막후 협의를 끝내고 드디어 공개한 법안이다. 이 법안에 부여된 의미는 상당히 크다. 벌써 석달 전 통과한 하원안과 절충절차를 거친 후 수십년 별러온 미국의 지구온난화대책에 마침표를 찍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기대치는 별로 높지 않다. ‘제 때 통과’ 전망이 어둡기 때문이다.
지난 주 열린 유엔총회 개막 전부터 이번 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기후변화라고 거듭 강조한 사람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었다. 우선 목표는 12월7일부터 시작되는 코펜하겐의 유엔기후변화 협상회의에서 2012년 종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국제협약을 마무리 짓는 일이다. 100여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22일의 기후변화회의는 말하자면 코페하겐에서의 성공적 합의를 위해 공감대를 마련하는 전야제인 셈이었다.
“합의안 도출에 실패한다면 우린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다음 세대의 운명과 수십억 인구의 삶과 희망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다”고 강조하는 반총장의 당부에 참석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위기에 처한 인도양의 저지대 섬나라 몰디브 대통령의 호소도 정상들의 마음에 닿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린 다 죽습니다. 우리나라는 존재조차 사라질 겁니다”
그러나 저마다 이해관계가 다른 각국의 정상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스피치의 주인공은 오바마 미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좋게 말하면 앞으로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노력을 선도해 갈 두 리더이기 때문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현재 지구온난화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두 주범국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있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개스 배출량의 40%가 바로 이 두 나라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책임 떠안기를 회피해왔던 중국이 이번엔 달라졌다. 온실개스 배출량을 ‘현저하게’ 줄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신흥대국의 위상과 책임을 실감한 것인지, 공학자가 대부분인 중국의 지도부가 자칫 중국의 생존을 위협할 지구온난화의 위력을 깨달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같은 중국의 태도 변화는 상당히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의 새 총리도 전 정권에 비해 온실개스 배출량 대폭 감축을 공약했고 유럽연합도 일본공약을 감안, 목표치를 상향조정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활기를 보이는 국제사회 분위기에 비해 오바마의 입장은 사실 좀 옹색하다. 물론 “갈 길은 멀고 험하며 시간은 부족하다…우리는 지금 차세대를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넘겨주는 위험에 처해있다”고 경고한 오바마의 연설은 언제나처럼 훌륭했다. 그러나 알맹이가 없었다. 아무런 구체적 약속을 할 수가 없어서다. 못 지킬 약속을 한 댓가가 무엇인지는 이미 클린턴을 통해 배운바 있다.
1998년 클린턴은 183개국과 함께 교토의정서에 서명했다. 2012년까지 온실개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7% 감축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했던 그 조약은 공화당이 장악한 당시 상원에 회부조차 되지 못했고 세계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통령을 가진 미국의 위상은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오바마의, 아니 미국의 리더십을 뒷받침해주어야 할 상원 기후법안의 12월 전 통과 예보는 출발부터 ‘잔뜩 흐림’이다. 요즘 모든 법안에 대고 외치는 공화당의 단골 구호 ‘일자리 죽이기’‘세금인상’이란 두 마디가 기후법안에도 어김없이 쏟아지고 있다. 타이밍도 나쁘다. 아직 한창인 헬스케어 개혁안 전쟁이 앞으로도 몇 주일은 족히 더 걸릴 듯해서다. 상원민주당 지도부조차 “기후법안은 내년에…”라고 고개를 흔든다.
그렇다고 “기후변화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라고 선언한 오바마가 코펜하겐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 대안이 없는 건 아니다. 환경보호청(EPA)의 행정명령으로 온실개스 배출량을 규제할 수 있다. 소송봇물과 함께 뜨거운 논쟁이 예상되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대책은 아니다.
실제로 상원 기후법안이 제출된 30일, EPA도 1만4,000개 업체에 적용될 배출량 규제령을 제안했다.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막으려고 했던 조치다. 보다 강력할 EPA 규정과 양자택일의 대상이 된다면 상원 기후법안에도 조금 서광이 비칠지 모르겠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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