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1일 새벽 4시30분. LA에서 북으로 200여마일 거리, 위트니산 기슭 395번 하이웨이가 136번 하이웨이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작은 마을 ‘론파인’(Lone Pine)의 ‘셰브론’ 주유소를 찾았다.
바람이 일 때면 주차장 구석의 애스펜(aspen) 몇 그루가 무수한 초록 이파리를 작은 손바닥처럼 팔랑거리며 손님을 맞는 곳이었다. ‘비숍’ 인근 산에서 캠핑을 하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 자정 조금 넘어 출발한 친구 가족 등 우리 일행은 화장실도 이용할 겸 차를 세웠다.
잠시 주유소 미니마트를 둘러본 후 커피메이커로 가 두 잔을 가득 채운 다음 계산대 앞에 섰다.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우리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일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이름이 ‘리 켈러’(Lee Keller)라는 덥수룩한 턱수염의 백인 업주는 “커피는 공짜”라며 돈을 받지 않는다. 연락처를 묻자 온화한 미소와 함께 건네주는 명함에도 ‘Free Coffee’라는 빨간 글씨가 또렷이 찍혀 있다.
순간,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해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오렌지카운티 사이프러스에서 왔다고 하자 “나도 옆동네인 부에나팍에서 살았다”며 반가워한 그는 “23년 전에 주유소를 사서 론파인으로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물건 구입과 관계없이 길손들에게 커피를 거저 주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과거 13년 동안 트레일러 트럭인 ‘18윌러’(18-wheeler)를 몰았던 그는 운전하는 사람들이 졸음과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지 너무도 잘 안다. 안 끝날 것 같은 캘리포니아의 사막길에서 깜박 졸던 운전자가 차가 갓길로 들어섰음을 깨닫고 놀라 운전대를 반대방향으로 틀다가 전복사고를 일으키는 사례도 많이 보아왔다. 이런 윤화를 조금이라도 막고픈 마음, 지친 이들에게 한 잔의 여유를 선사하고픈 순수한 마음에서 그는 장사 첫날부터 말없이 사랑을 실천해 왔다.
커피와 설탕, 크림, 커피컵, 뚜껑 등을 구입하는 데 쓰는 돈은 한 달 평균 1,200달러. 이 일을 해 온 세월이 23년이었으므로 그는 이제까지 줄잡아 33만여달러를 초면의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쓴 것이다. 아니, 원가가 그 정도였으니 이문을 붙여 팔았다면 모르긴 해도 그는 100만달러에 가까운 돈으로 자신의 배를 더 불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재산 증식 대신 사랑을 선택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돈이 남아돌아서도 아니었다. 65세지만 그는 지금도 주 7일, 매일 새벽 3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13시간반 노동을 ‘친다’. “세금, 공과금, 인건비 등을 제하고 나면 이 비즈니스에서 별로 남는 것이 없다. 요즘 같은 불경기엔 더 어렵다.” 그가 설명하는 긴 근무시간의 이유다.
그라고 왜 돈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커피를 무료로 대접받을 때 오가는 길손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보면서 그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다. 사람들과 대화하며 정을 주고받을 수 있어 지금껏 일하고 있다. 내가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작은 ‘선의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 매출건수가 800회 정도라는 그는 커피가 하루 몇 잔 나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웃들의 마음을 밝힐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며 조용히 섬길 뿐이다.
일행과 다시 길을 떠나면서 그가 살린 목숨이 얼마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니 ‘아닌 밤중에 감동’이 가슴에 밀려 왔다. 아울러 떠오르는 복음성가 한 자락이 있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본질을 놓치는 바람에 한국에선 개신교의 교세가 위축되고 조직적인 안티세력까지 생겨나는 이즈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섬긴다고 하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조건없는 섬김과 희생,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 날개 다친 철새처럼 상처받은 이민자들에게 따스한 한 줌의 위로를 준다면, 모든 목사가 세속적인 잣대의 성공은 아닐지라도 하늘에서 인정받는 ‘보람있는’ 목회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장섭 /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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