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늦더위가 8월의 마지막 자락을 물고 늘어진다. 오늘도 나는 습성처럼 글쓰는 방 뒷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고있다.
여름이면 나는 내 글 쓰는 방 뒷문창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나는 연붉은 넝쿨꽃을 기다린다. 사춘기도 아닌 내 나이에 꽃피기를 기다리다니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게 뻔한데 말이다.
내가 Cupertino 에서 살다가 12년전 이곳 Campbell에 이사온 그해 7월에 나를 반겨준 꽃이 있었다면 그 꽃은 옆 집에서 우리집 담장 넘어로 뻗은 가지에서 탐스럽게 피어 있던 넝쿨꽃이다. 사전에 빨간 꽃이 피는 열대식물이라고 적은 부겐 빌리아(Bougan Villaea) 였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보아 왔던 줄장미 같기도 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이 연붉은 부겐 빌리아! 내가 이사와서 글 쓰는 방으로 정한 중간방 뒷쪽 창틀 속에 동양화 같이 피어 있던 이 줄기 꽃은 날마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쓰다가 구상이 떠 오르지 않을 때나, 눈의 피로를 느낄때 회전의자로 돌아 앉아 부겐 빌리아를 바라 볼때면 그 꽃은 나에게 언제나 휴식의 숨을 쉬게 했고, 또한 새로운 작품구상의 물고를 터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넝쿨꽃은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와 함께 수 많은 글을 써 온 동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뿐인가 글 쓰다 말고 무심결에 돌아 앉아 그 꽃을 바라 보았을때, 골목바람에 하늘거리는 이 꽃이 내 글방 창 유리창을 뚫고 손을 내밀어 바싹 마른 명태 껍질 같이 까칠한 이 할애비의 빰을 가볍게 쓰담아 주는 내 귀여운 외손녀 ‘하나’의 손길 같이 느껴지기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주 토요일, 내가 자주 만나는 문우(글쓰는친구) 둘과 함께 얼렸다가 집에 돌아 와, 다음 달 작품을 쓰기 위해 공부방에 들렸을 때 이 넝쿨꽃 가지가 송두리채 잘리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 날이 마침 메키시컨 (Mexican) 가드나 총각이 오는 날이라, 집사람이 그 놈에게 꽃가지를 잘라 달라고 시킨 것으로 짐작하고 여보, 여기 와봐요! 라고 소리 쳤다. 달려 온 마누라에게 창틀을 가르키며 내 꽃 어디 갔어?라고 다시 소리쳤다. 소리 쳤다기 보다는 발악을 했다고 한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꽃이 깡그리 잘리어 나간 것을 본 마누라는 눈이 휘둥굴해 져 아니, 당신이 좋아 하던 꽃이 없어졌네!라고 대꾸하는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집사람이 시킨 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그 넝쿨꽃을 자르도록 지시한 게 마누라라고 단정한 까닭은 매주 토요일 정원사가 올 때마다 해가리게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가 잔디 깎는 일에서 붙어 나무 짜르는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하루는 글 쓰는 방 뒤쪽 골목 길에 느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이 부겐 빌리아 꽃잎을 깨끗이 쓸어 담어라는 마누라의 강요 같은 말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아니라 언젠가 나에게, 꽃은 예쁜데 꽃잎 쓸어 내기가 힘 드니 잘라 버리는게 좋겠다는 혼잣말 비슷한 마누라의 불평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좋아 하던 넝쿨꽃 가지는 잘리어 나가고, 옆 집 지붕의 우중충한 회색 담벼락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듯 내게 다가 올 뿐이다. 전에는 내가 글을 쓰고 있노라면 방문을 빼쪼롬이 열고 눈도 안 좋은데 그만 쓰소! 라고 말을 던지던 마누라는 꽃가지가 잘려 나간 후에는 방문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 깔끔증 때문에 행주 같이 뽀얗게 빤 청걸래로 마루바닥이 무슨 죄가 있다고 씩씩 거리며 뽀독뽀독 대패질 하듯 딲으며 멀어져 가는 소리만 들려 온다.
이러한 마누라의 행동은 그가 내뱉은 말이 씨가 되어 잘리어 나간 그 넝쿨꽃으로 인해 마음이 크게 상한 영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꽃가지를 잘라 쓰레기 통에 담아 실고 살아진 그 메키시컨 머스마는 지나치게 간섭하는 주인 마님에 대한 복수를 야무지게 했다고 통쾌해 하며 떠나 갔을까? 새로운 가지가 뻗고, 전과같이 풍성한 꽃이 피기까지는 적어도 2, 3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이 늙은 주인 영감의 마음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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