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시부터 걷기 시작한다. 비가 올 것만 같다. 청풍명월 고장답게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고, 그 중에도 배론 성지는 꼭 들러가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자동차 여행과 달리 걷는 길은 한걸음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지방도로를 따라 평창으로 가는 가까운 길을 택하지 않고 영월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좀 멀더라도 단종제를 보고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억의 ‘각설이타령’ 마음은 그 시절로
전야제 도중 부슬부슬, 그의 눈물이런가
단종문화제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던 시절 우리의 모습을 담은 ‘각설이 타령’을 지켜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옆에 앉은 손님이 무엇 때문에 국토종단 이라는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고 싶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니까요.” 한 마디 덧 붙였다. “하고픈 일을 하면 가슴이 뛰지 않던가요?”
제천 시내를 걸어가는데 “나는 내토 중학교 주인임이 자랑스럽습니다”란 글이 멀리 보인다. 저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어디서나 ‘자랑스러운’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고차 판매업소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전시된 차를 열심히 닦고 있다. 길가여서 닦아 놓은 차에 금방 먼지가 날아와 앉는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하는데 월급이 70만원이라고 한다.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이렇게 용돈이라도 벌어 쓸 수 있으니 다행 아니냐며 희미하게 웃으신다.
시내를 벗어나니 풍경이 좀 한가하다. 노인 부부가 언덕에서 봄나물을 캐고 있다. 소곤소곤 얘기를 하며 나물 캐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다. 할아버지는 76세, 할머니는 72세라고 했다. 노부부의 평온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어느 스님이 해 주신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한 집안 3형제가 같은 날 죽어서 저승에 갔는데 모두 억울하다고 하니 염라대왕이 듣기에도 딱한 바가 있었다. 그래 ‘너희를 다시 살릴 수는 없지만 원하면 새로 태어나게 해주겠으니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첫째는 부자로 태어나기를 원하고, 둘째는 권력을 갖기를 원해서, 바라는 대로 해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마지막 셋째에게 소원을 묻자, ‘마음에 드는 여자 만나서 먹고살 정도의 땅을 일구며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게만 해주시라’고 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야 이놈아 그런데 있으면 차라리 내가 가겠다’고 했더라”는 이야기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혹시 저 노인이 그 셋째 아들이 아닐까?
언덕을 올라가는데 ‘일영장갑 공장’이라는 간판이 보여 잠깐 쉬어갈 겸 방문을 했다. 면장갑 손바닥 부분에 빨강색 고무풀을 입혀 판매하는 곳이다. 주문한 만큼만 만들어 파는 자그마한 가족경영 회사라고 젊은이가 말한다. 얘기를 하면서도 기계를 따라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온 가족 모두, 기계와 사람이 구별이 안 될 만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냥 먹고사는 정도의 수입이라고 하는데, 먹고사는 일이 저렇게 바쁘고 힘들다.
4차선 제천-영동 간 지방국도를 따라 걷는다. 지방도로보다는 지름길이지만,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시끄러워 맘에 들지는 않는다. “산불조심은 산과의 약속입니다”는 불조심 표어가 보인다. 전북 임실을 지나오면서 보았던 “논밭두렁 태우려다 금수강산 다 태운다”는 표어와 느낌이 다르다. 멀리 아시아시멘트 회사 보인다.
느릅재 터널이 가까워 오는데 경찰관 한 명이 숨어서 속도위반 차를 단속하고 있다. 저렇게 안 보는 곳에 몸을 감추고 교통위반자를 적발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젊은 순경한테 다가가 잠깐 얘기도 나누고 물 한 잔을 나눠 먹었다. 다시 걸어가려고 하는데 그 길로 가면 위험하니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가라고 한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위법이라면 모르지만, 그동안 여러 지방을 걸어오면서 4차선을 걸어왔다고 이해를 구한 다음에 터널을 통과 했다.
느릅재 터널을 벗어나니 강원도다. “하늘이 내린, 살아 숨 쉬는 땅! 강원도”라고 쓴 입석이 서 있다. 강승월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길가에 ‘제43회 단종문화제‘를 선전하는 큰 입간판이 보인다. 오늘 저녁 있을 전야제에 참석하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다시 4차선을 따라 걸어가다가 영월 13킬로 지점 ‘신주막’에서 내려 좁은 지방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59번 도로다. 편하고 조용하다. 그리고 오붓하다. 가뭄에 콩 나듯 차가 지나갈 뿐, 적막한 산 속이다. 창원리 간이 버스 정류장에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푹신한 의자 2개가 인상적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걷는다. 기차가 시멘트를 싣고 지나간다. 비는 오고 빠른 길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마침 다시 4차선 도로가 보이기에 올라 바삐 걸어서 영월에 도착. 여관을 잡느라 진땀을 뺐다.
전야제 도중 비가 왔다. 단종의 눈물인가 보다. 밤이 깊어간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은 많은 정류장을 거쳐 지금에 왔다. 강원도에서 만난 봄비 젖은 간이 정류장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두 개의 의자가 인상적이다.
강원도는 때론 투박하면서도 정겨움을 선사하는 지역이다. 지역적 특성을 묘사한 표지석이 낯설지 않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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