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명의 남가주 한인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으로 직접 본 것은 아마도 1983년 10월14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린 LA 그리피스팍 산등성의 야외극장 그릭 디어터에 설레는 가슴으로 모여들었다. 고달픈 이민생활에 처음 와보는 야외극장이 낯설어 약간은 어색해하면서도 5,000여 좌석을 가득 메운 한인들을 열광케 했던 그날의 연사가 김대중이었다. 광주민주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 그는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이듬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형된 후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
70년대부터 고개 든 재미한인사회의 반정부 기류가 뜨거워진 것은 광주사태를 ‘목격’하면서였다. 군부의 보도관제로 아직 한국에선 그 실상조차 채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미국의 한인들은 광주의 참상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당시 LA한국일보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광주의 실상을 가장 자세히 가장 많이 보도했던 매체였을 것이다. UPI 통신의 전송기를 통해 탁,탁,탁,삐이- 발신음과 함께 글과 사진으로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광주의 참상을 기자들은 빠짐없이 지면에 담았고 독자들은 빠짐없이 보고 읽었다.
본국에서 못지않게 몸서리치고 분노하며 민주화를 갈망했던 재미한인들에게도 김대중이란 이름은 등불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투옥, 연금, 납치, 사형선고, 망명 등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 자체가 민주화 실현에 대한 약속을 상징했다. 그날 야외극장에서 김대중이 확보한 것은 재미한인들이 한마음으로 보내는 순수한, 무조건의 지지였다.
80년대 중반 한국의 정국은 어지러웠다. 이곳 한인들은 매일저녁 미국 TV뉴스에서 한국대학가의 시위장면을 지켜보아야 했다. 경찰이 ‘탕’하고 책상을 치자 수사받던 학생이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의 어이없는 발표가 나오고 중학교 때 광주참사를 겪은 연대생 이한열군이 시위중 최루탄 파편에 숨지는 사태를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보며 한인들은 김대중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가 2년3개월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계속되던 무조건 지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선을 전후해서였다.
김영삼과의 야당 분열로 후보단일화에 실패, 눈앞에 다가온 민주화 실현을 놓친 것은 그의 정치역정 중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당시 야당의 정치고단자들은 정치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며 후보단일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그런 정치는 몰라도 민주화를 갈망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단일화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이었다. 실망한 여론도 쉽게 용서하지 않았고 김대통령 자신도 “그때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 후에도 정계은퇴 번복, 선거 전략에 따른 분당과 창당 등이 거듭되면서 김대중에 걸었던 한인들의 뜨겁고 순수한 기대는 점차 퇴색했다. 본국에서처럼 이곳에도 반DJ의 보이스가 제법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재미한인사회는 김대중의 정치적 영토에 속했다.
김대중과 재미한인사회의 관계는 그만큼 남달랐다. 어렵고 막막했던 망명시절, 민주화라는 순수한 염원에서 시작된 일반한인들의 지지도 뜨거웠고 생활비 각출에서 미국정계 인맥관리에 이르기까지 헌신적으로 돕던 측근들의 동지애도 끈끈했다. 그는 4.29폭동이 발생했던 92년 맨 먼저 날아왔던 한국의 정치인이었다. 폐허가 된 가게 앞에서 그의 따뜻한 위로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던 한 피해상인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LA 한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98년 드디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그는 우리들을 잊지 않았다. 해외동포의 권익보호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그의 취임사 구절은 그저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이듬해 재외동포특례법을 입법화시킨 그는 재미한인들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진지한 관심을 보인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정치가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이미 상당부분 이루어졌으며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이다. 민주화 투쟁이나 지역갈등 심화 등은 공과 과에 별 이견이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처럼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안도 있다. 대북관계의 새 지평을 연 위대한 과업임은 노벨평화상으로도 인정받았지만 19일자 월스트릿저널의 사설처럼 ‘가장 큰 실수’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북한의 비핵화가 물 건너간 일’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과 함께 보수진영의 비판이 강해지면서 논란의 여지를 더해주고 있다.
평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제 ‘파란만장한 영욕의 일생’이란 요란스런 표현이 전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삶을 끝내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도 해외동포를 ‘조국을 버린 자’가 아닌 ‘한국의 귀중한 해외자산’으로 존중해주었던 대통령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며 그를 배웅하고 있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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