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김대중이 살아서 워싱턴에 오다니 꿈만 같습니다.”
1982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23일 밤 10시경. 노스웨스트 020편으로 내셔널 공항에 내린 망명객 김대중의 도착 일성은 살아남은 자의 기쁨과 회한으로 뒤섞여 있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자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길이었다. 공항에는 DJ 환영인파와 취재진 등 100여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인파를 피해 공항을 빠져나온 DJ는 서유웅이 대기해둔 차에 타고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의 힐튼 호텔로 가 여장을 풀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와 두 아들인 홍업, 홍걸 씨만이 그를 지켰다. 이틀을 호텔에서 묵은 그의 가족은 한 미국 천주교 시설에 잠시 몸을 맡겼다 1월 알렉산드리아의 랜드마크 소재 워터게이트 콘도에 세를 얻어 입주했다. 그렇게 DJ는 워싱턴 동포사회의 일원이 됐다.
1972년.1982년 두 차례 망명생활
GW대서 “민주화만이 살길” 연설
이근팔씨등 동포들과 동지적 교분
유신으로 첫 워싱턴 망명
김대중의 망명은 80년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워싱턴과의 첫 인연은 1972년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맺어졌다.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항의 성명을 내고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을 위해 워싱턴으로 망명했다. 그가 사무실을 내자 워싱턴은 ‘민주화운동의 해외본부’처럼 변했다. 73년 7월6일 DC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대회를 열었다. 김대중이 준비위원장, 안병국, 김응창, 동원모, 전규홍 등이 준비위원으로 뽑혔다. 이 행사장에서는 주미 공보관장을 지낸 이재현이 망명을 선언하며 기세를 높였다.
첫 망명의 추억은 짧았다. 김대중은 대회 후 일본으로 잠시 떠났다 8월8일 동경에서 납치사건을 겪는다. 그 후 한민통은 안병국을 위원장으로 ‘김대중 보호 한미시민위원회’를 발족해 8월17일 워싱턴 시내 메리디안 힐 공원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2백 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첫 자동차 시위로 이목을 끌었다. ‘박정희 정권은 물러가라’ ‘한국 정보원을 축출하라’는 구호를 붙인 100여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밝힌 채 16가를 통해 백악관 앞과 17가를 거쳐 한국대사관 앞으로 돌았다. 시위 후 참가자들은 한민통 결성대회를 열어 김대중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광주의거 기념식서 흐느껴 울어
두 번째 망명지인 워싱턴에서 그는 전두환 정권의 기대처럼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조용히 살지 않았다. 당시 DJ와 가깝게 지냈던 문동환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내가 정치를 안 하고 살 수 있겠느냐며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연설활동에 매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듬해 3월12일 첫 행동에 나섰다. 조지 워싱턴대 강당에서 연 강연회에는 1천200명이 몰렸다. 강단에 선 그는 “민주회복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역설했다. 1시간45분 동안의 연설에 50여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대중은 이 강연회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5월22일 호남향우회가 연 광주의거 희생자 3주년 추도식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알렉산드리아의 프렌시스 하몬드고 강당에는 김대중을 보기위해 1천200명의 한인들이 찾았다. 그는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한을 푸는 것”이라며 추도사를 읽다 “한 많은 광주의 영령이여”라는 대목이 이르자 그만 목이 메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날 광주 현장의 비디오가 상영되자 동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워싱턴 한인사회 전체가 반정부로 돌아선 날”이라 부를 만큼 그 파장은 컸다.
워싱턴은 이 망명객의 유배지이자 정치적 도약을 위한 산채였다. 김대중은 83년 2월27일 뉴욕의 퀸스대학 강연을 시작으로 6월25일 시카고 대까지 미 동중부의 대학들을 순방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역설했다. 83년 6월에는 뉴욕타임스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단식 지지 및 투쟁의 의의를 설명하는 기고문을 냈다. 국내에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상현 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83년 8월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해 미국 내 활동을 위한 기반으로 삼았다.
그해 11월에는 ABC- TV의 테드 코펠이 진행하는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장 보좌관이던 현홍주(훗날 주미대사)와 한국의 인권문제를 놓고 영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워싱턴의 동지들
워싱턴에서 그는 여러 동포들과 동지적 교분을 맺었다. 그들의 인연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정의감에 근거했다. 이근팔, 최성일, 김응태, 심기섭, 박문규 목사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근팔 씨(85)는 주미대사관의 외교관으로 있다 1970년 공직을 떠나 미국에 눌러앉았던 인물. 그는 워싱턴에서 여행사를 했던 DJ의 처남 이성호씨(전 워싱턴한인회장)의 소개로 DJ의 ‘비서실장’을 맡아 보좌했다. 이 씨는 “그분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촌각을 아끼면서 남북통일과 민주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분”이라고 되돌아봤다.
뉴욕주의 윌리엄 & 허버트 대 교수이던 고 최성일 박사는 아예 교수직을 버리고 DJ의 연설과 정치인 면담 등을 위해 전국을 누볐다. DJ의 저서 ‘대중경제론’을 영어로 번역하고 출간을 주선한 이도 그였다.
심기섭은 DJ가 옥고를 치르며 세상과 단절돼 있을 때 유일하게 세상 소식을 전해준 워싱턴 동포였다. 심은 1주일에 한 번씩 이희호 여사에 국제전화로 미국의 동정과 언론 보도 내용 등을 전해주었다. 또 수감 중이던 DJ에게도 편지를 보내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 인연으로 내셔널 공항에 내린 DJ는 얼굴도 모르는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심기섭이 누구냐?”며 찾았다. 훗날 DJ가 집권하자 심은 한국냉장 사장으로 발탁됐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외로웠다. 레이건 정권은 의도적으로 DJ를 피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의 테드 케네디, 스테판 솔라즈 의원들과 교분을 나눴다. 토마스 오닐 하원의장도 그의 지지자였다. 동포들도 그의 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서슬퍼런 시절이었다. 한국 대사관과 안기부의 매서운 눈길은 동포들을 옥죄었다.
DJ 부부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김응태 전 워싱턴 평통 회장은 “그분을 만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할 때였다. 불이익을 당할까 그분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DJ는 누가 집으로 찾아오면 반갑게 맞았다. 그만큼 외로운 망명생활이었다.”고 회상했다.
살던 콘도에 세워진 초석
그는 정치적 장래를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 1985년 2월8일 조국을 떠난 지 2년2개월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내셔널 공항에는 많은 한인들이 피켓을 들고 환송했다. 그리고 20명이 신변 안전을 우려해 ‘가이드’로 동행했다. 그 중에는 이근팔, 김응태, 윤덕중도 있었다. 심기섭은 1주일 전에 가 있었다.
“노스웨스트 기는 전세기나 마찬가지였다. 내외신 기자들 70여명에 에드워드 케네디 등 연방 의원 2명이 보호자로 한국 방문에 나섰다. 필리핀의 아키노처럼 망명 후 귀국길에 암살당한 전례가 있었기에 너도나도 나선 것이었다.”
김응태의 전언처럼 당시 한국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강압적 통치가 삼엄하던 때였다. 그의 귀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켰다. 신민당 돌풍과 직선제 개헌투쟁에 이어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는 진전돼 갔다.
그리고 1998년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집권해서도 DJ와 워싱턴의 인연은 계속됐다. 그는 98년, 99년, 2001년, 세 번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다녀갔다. 퇴임 후에도 강연을 위해 찾았다.
2000년 6월에는 워터게이트콘도 주민들이 김 대통령의 체류를 기념하는 초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 화강암 바탕에 동판으로 된 초석은 영문과 한글로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기보다는 하나님과 국민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주변에는 김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애질리아 꽃이 심어졌다. 그는 방 4개짜리인 이 콘도 4동 1608호에 가족들과 머물렀다.
그의 재임 중에는 인권연 산하에 후광(後廣) 김대중 역사자료센터도 세워졌다. 그가 망명생활 중 사용했던 개인소품들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뜻 깊은 자료들은 얼마 뒤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18일 도전과 영욕으로 가득했던 삶을 끝냈다. 워싱턴에서 그는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체력을 회복했고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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