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시인 T.S. 엘리엇의 서사시 ‘황무지’는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로 시작되지만 지금 민주당 의원들은 이렇게 바꾸고 싶을 것이다 : “8월은 잔인한 달, 허황된 루머가 성난 폭도들을 불러 모으고…”
백악관이 우려한 8월의 함정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방의회의 8월 휴회전 상하 양원이 각기 헬스케어 개혁안 표결을 끝내도록 일정을 재촉한 것은 항의시위와 TV선전등을 동원한 보수진영의 여론몰이를 예상한 때문이었다.
일정에 못 맞춘 민주당도 어느 정도 대비는 했었다. 휴가지침은 간략했다 : “주민들에게 개혁의 혜택을 주지시켜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지역구로 내려가는 의원들에게 3x8 인치 크기의 카드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헬스케어 개혁의 핵심요소들을 간추려 적은 카드로 말하자면 8월의 승리를 위한 휴대무기였다.
공화당의 전략은 ‘밀어붙이기’였다. “헬스케어 개혁에 대해 증가하는 유권자들의 우려를 최대한 활용한다, 불안감이 뇌리에 박히도록 계속 강조하라”
헬스케어 개혁을 둘러싼 워싱턴의 캠페인이 미 전국의 표밭으로 옮겨지면서 백악관과 민주·공화 양당도 나름 대비는 한 것이다. 그런데 휴회 두 주째로 접어드는 요즘 뉴햄프셔에서 남가주까지 산불처럼 번지고 있는 찬반의 대립은 논쟁이 아니라 전쟁이다. 반대의 목소리가, 시위자들의 항의열기가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뜨겁다.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기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마련한 타운홀 미팅은, 한국 국회보다는 못하지만, 연일 고성과 야유가 난무하는 분열의 전당으로 변해버렸다. 민주·공화 양당 뿐 아니라 의료관련 업계까지 “현재 그대로는 안된다. 개혁이 필요하다”엔 이미 합의했다. 의견이 갈린 것은 개혁의 방향이다. 그러나 타운홀 시위대는 “이렇게 힘든 때 왜 개혁을 서두르냐”며 아예 개혁의 필요성부터 반박하고 나섰다.
민주당의 지적대로 항의시위가 순수한 지역주민들의 의견표시가 아닌 이해집단의 조직적 방해공작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던 개혁추진에는 좋은 조짐이 아니다. 반대 시위가 미디어에 집중 보도되면 말 안하던 다수의 공감을 얻기가 훨씬 쉬워진다. ‘메시지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바마 개혁안을 반대하는 공화당 보수진영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불안과 공포를 강조한다 : 당신의 혜택은 삭감되고, 수천억 달러 적자가 늘어나면 증세는 결국 불가피해진다. 의료서비스를 정부가 장악하는 사회주의가 당신의 자유 선택권을 제한 할 것이다 …
방어해야하는 민주당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힘들다. 헬스케어 개혁 자체가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길게 설명하자니 메시지는 자연히 약화된다. 개혁안의 핵심 사항들조차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 ‘치솟는 의료비를 줄이고 보험커버를 전 국민에게 확대한다’는 기본 목표부터 설득시키자면 돈을 줄이면서 돈을 더 쓸 수 있는 마법같은 정부의 묘책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타운홀 아우성과 함께 확산되기 시작한 악성 루머에도 대처해야 한다. 대부분 근거 없는 넌센스에 불과하지만 감정을 묘하게 자극하는 이슈들이다. 미국을 빵 배급받기위해 길게 늘어섰던 러시아처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 하느냐는 극단적 항의도 있고, 미국의 정부의료보험인 메디케어의 수혜자인 노인이 왜 보험을 정부가 주도하려 하느냐고 소리치는 아이러니도 있다. 가장 압권은 새라 페일린의 ‘작품’이다. 오바마 정부가 노인이나 장애자에 대해 나치처럼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가려내는 ‘죽음 위원회’를 만들어 안락사를 조장시키려한다고 주장한 것. 과연 이 사람이 미국의 부통령이 될 뻔한 정치가인가를 의심케 하는 망언이지만 ‘안락사’가 계속 핫이슈로 제기될 만큼 타운홀 논쟁은 감정적으로 치닫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이 온몸으로 막아내야 할 타운 홀의 반대열기가 얼마나 더 뜨겁게,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당분간 쉽게 가라앉을 기세는 아니다. 개혁안의 운명은 의원들이 이 ‘잔인한 8월’을 무사히 견디어내고 9월 워싱턴으로 돌아간 후 결정된다. 지역주민들의 반대를 어떻게 체감했는가에 따라 표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내셔널 저널지는 개혁안의 의회표결 결과를 4가지로 예상했다. 첫째 초당적 합의로 통과, 둘째 공화당 전원 반대, 민주당 전원 찬성으로 통과, 셋째 민주당 내분으로 대폭 약화된 무늬뿐인 개혁안 통과, 그리고 넷째, 부결이다. 현 상태로 보면 초당적 합의는 불가능하고 민주당 전원 찬성도 타운홀의 분노로 힘들어졌으며 ‘부결’은 민주당 지도부가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 분명해 대폭 약화된 개혁안 통과가 그중 가깝지 않을까라고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관망한다.
어제 뉴욕타임스에 이런 내용의 독자편지가 실렸다 : “내가 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보험료,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절차, 아플 때 기댈 수 있는 헬스케어다. 민간이든 정부든 상관없다, 병들어도 파산하거나 보험에서 쫓겨날 걱정만 없다면” - 대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렇게 소박하다. 세계 최고의 나라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과제일까.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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