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CNN 방송에서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본 중 가장 터프한 협상가”라고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평가한 북한의 협상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5개월 가까이 끌어 온 북한의 미국여기자 2명 억류사건은 이례적으로 활짝 웃는 김정일의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여기자들의 석방을 위해 북한은 3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첫째 인권을 거론말라, 둘째 무죄 석방이 아니라 사면임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반드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보내달라. 클린턴의 전격 방북에 얽혀 다양하게 흘러나오는 뒷이야기 중 연방의회 한인 소식통이 전하는 단면이다.
북한과 클린턴의 관계는 남다르다. 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북한의 관계는 서로 인신공격을 쏘아댈 정도로 껄끄럽지만 남편 빌 클린턴은 북한 지도층이 가장 호감을 갖고 신뢰하는 미국 대통령으로 꼽힌다. 미국의 현직 장관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전직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현직 대통령이 방문 의사를 밝혔던 것도 모두 사상 처음으로 클린턴 재임 중이었다. 북한은 핵시설 동결을 약속하고 미국은 에너지 지원을 다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해빙 무드가 완연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바마보다도 국제무대에 더 낯설었던 남부 주지사 출신 클린턴이 1차 북핵위기에 직면한 것은 취임한지 불과 2년만이었다. 영변 핵시설 정밀공격이라는 강경대응까지 고려하던 젊은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 카터가 해결을 위한 북한방문을 자원했고 성공적으로 진행된 카터의 방북외교는 제네바 합의를 도출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94년 참모들이 카터의 방북논란을 우려했을 때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게도 탈출구를 주어야 하니까. 체면을 잃지않고 내려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니까” 방북길에 오르기전 카터도 국무성 실무자에게 물었다. “김일성이 원하는게 무엇인가?” 그리곤 스스로 대답했다. “존중이겠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관계는 그 후 한국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맞물리면서 순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임기말인 2000년 11월 북한을 방문하여 핵문제를 마무리 짓고 북미 수교를 단행하려던 클린턴의 계획은 다급해진 중동평화회담에 밀리고 시간에 쫓기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북한은 클린턴에게 15년전 시작한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아있는 셈이다.
이런 클린턴과 김정일이 3시간 넘게 만났다. 대화내용이 여기자 석방을 넘어섰을 것은 당연하다. 클린턴의 위상, 북한에 대한 지식과 이해, 현재 얼어붙은 북미관계 등 무엇을 감안해도 미리 보장받고 온 석방만을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오바마의 구두 메시지가 있다는 북한의 주장과 없다는 백악관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그것도 큰 의미는 없다. 전직대통령이자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현직대통령의 정권인수위원장을 대동하고 나선 ‘클린턴의 방북’ 자체가 충분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못박는 ‘개인적 차원의 인도적 사명’을 띤 이번 방북의 목표는 일단 성공했다. 5일 아침 버뱅크 공항에서 눈물로 가족들과 재회하며 악몽의 끝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전하는 두 여기자의 모습은 미국인 모두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감동의 장면이었으니까.
북한도 ‘사면’이란 선심을 쓰며 원했던 첫 대가는 챙긴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엔 중병설을 일축하는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 ‘불량집단’이었던 그들이 미국의 ‘사과’를 받으며 ‘범법자’를 인도적으로 사면해주는 관대함을 보여주었고, 국내 인민들에겐 미국의 전직대통령을 불러들이는 지도자의 위상을 과시했으니까.
이제 남은 평가는 클린턴 방북의 장기적 성과다. 극우보수진영은 테러리스트와의 거래라고 공격하며 앞으로 대북관계에서 미국의 더 많은 양보를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보이스가 그리 크지는 못하다. 아직은 피상적인 전문가들의 분석도 미국과 북한 모두에게 ‘윈윈’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관심은 클린턴이 평양에서 두 여기자와 함께 싣고 온 방북 보따리에 쏠리고 있다. 클린턴은 김정일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상태를 관찰하고, 김정일은 오바마의 의중을 체크하는 탐색전에 그쳤을 수도 있고 양쪽 정부가 원하는 것을 여과없이 제시하는 포괄적 패키지의 교환까지 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당장 가시적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성급하겠지만 설사 탐색전에 그쳤다 해도 현재의 북미 대결관계가 대화를 통해 새 출발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대화가 시작되어야 서로에게 요구하는 ‘비핵화 조치’와 ‘적대정책 철회’에 대한 결단도 기대할 수 있고 그 결단이 이루어져야 우리가 염원하는 한반도 안정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박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