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전쟁이후 지금은 선교의 때다
한반도 통일은 요시야의 개혁으로 가능
신들의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전쟁으로 끝난다. 아니, 처음부터 인간의 전쟁이었다. 인간이 신의 가면을 쓰고 나선 전쟁일 뿐이다. 전쟁의 피해는 인간이 본다. 젊은이가 피를 흘리고, 여자들이 쓰러졌다.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연기 속을 헤집고, 노인들이 가슴을 뜯는다. 이게 전쟁이다.
한반도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한쪽의 오판만으로도 언제든지 전쟁 재개가 가능하다.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한반도는 인명은 물론 그동안 쌓아올린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것이다. 한반도의 위기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길은 통일뿐이다.
통일비용이 심각할 것이다. 북한의 인구 대부분은 한 세대를 굶주렸다. 저들은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 판단력에도 문제(damage)가 생겼다. 통일이후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모두를 “한꺼번에” “사회보장제도” 안에 “즉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통일 한국의 경제는 순간적으로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통일비용이다. 더욱이 지역 간의 갈등도 이전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계층 간의 위화감도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역사에서 소중한 것은 값을 치르지 않고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지금 통일을 말하는 개인의 수는 적다. 어떤 단체도 통일을 깃발로 걸어 내세우지 않는다. 정치적 구호에서 통일은 이미 매력을 잃었다. 표와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몫이다. 성전에서 발견한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주제는 “세 가지 하나”(three ones)다. 곧, 한 하나님, 한 성전, 한 백성이다. 이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예루살렘만을 성소로 인정함, 그리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하나 되는 “통일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신명기역사(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의 주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허락하신 땅 가나안에서 분열과 파멸을 경험하고야 만 이스라엘을 따라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말하자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
을 얻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요시야처럼 성경을 바탕으로 한 개혁으로 가능하다. 요시야 개혁은 필히 한 하나님, 한 성전/교회, 한 민족을 말한다. 첫째로, 오늘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다른 모든 신들은 결국 “물질신”이다. 물질은 다스려야 하지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둘째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 양적 성장이라는 허무한 목표를 세우고 각개전투(各個戰鬪)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셋째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다. 통일은 한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 된 교회가 주체세력이다. 통일의 길에 정치적이고 경제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 울 수 있는 교회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엘레판틴의 신전 문제로 돌아가 보자.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났지만, 아케나텐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 남긴 여호와 유일신 신앙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 이집트를 겨냥한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사야는 그중에 가장 탁월하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5:22-23, 개역
지금이 그때라고 믿는다. 수 천 년 동안 모래바람만 지나갔던 이집트 광야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발자국이 새겨져야 할 때다. 요셉이 걸었던 길, 출애굽 이스라엘이 끝도 없이 걸었던길, 그 길 위에 복음 전도자의 발자국이 새겨져야 할 때다. 역사의 방향을 과거로 돌려, 철옹성 같던 앗시리아의 추락과 신흥 강대국 바빌로니아의 기흥, 이집트의 도발 등으로 앞날을 알 수 없던 시대에 여호와 유일신앙으로 성전과 나라를 개혁하고, 끝내 남과 북을 통일한 왕 요시야를 만날 수 있다. 요시야는 개혁의 범위를 예루살렘에서 유다, 그리고 당대에 이미 100년 전에 앗시리아의 말발굽 아래 멸망해 버린 땅 북이스라엘 전역까지 확대했다. 그가 최후를 맞이한 므깃도는 북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에서 가까웠다. 말하자면 요시야는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던 나라를 꼭 300년만에 재통일 시켰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말씀을 발견했고, 그 말씀 앞에 옷을 찢고 회개한 후, 말씀에 바탕을 둔 철저한 개혁을 실시한 결과였다. 여호와 유일신앙을 회복한 지도자 “요시야”와, 그가 통일한 “이스라엘”은 메시야니즘의 역사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전반부와 후반부에 성전청결을 실시하셨다.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아우르는 사역을 실천하셨고, 그것을 바탕으로 “땅 끝까지 가는” 선교를 당부하셨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이룬 남북통일은 오늘 어느 때보다 긴장 높은 한반도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의 행간이다. 말씀대로 살면, 그대로 순종하며 개혁을 하면,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통일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한반도 통일을 바탕으로 말씀을 들고 우리는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는 선교한국의 비전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들은 말씀 앞에 자기 옷을 찢는 요시야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 시대는, 특히 미국은 “가능한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복잡다단한 세상이다. 관용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평등이라는 거역하기 정말 어려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인정한다. 동성애가 정상으로 인정되고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는 추세다. 이런 물결에 샌프란시스코가 앞장섰다. 이건 정말 아니다. 흰 말을 붉다고 말할 수 없다. 흰 것 은 흰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은 새로운 창조의 기회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스스 로를 개혁하고 퇴로를 차단하고 협상카드를 버리고 그 대신 무릎을 꿇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일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사용하셔서 새로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물을 흐르게 하실 것이다.
투탕카문의 유물 전시는 내년 3월까지다. 거기서 우리는 투탕카문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섭정자들이 손길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어린 투탕카문을 앞세워 없애려고 힘썼던 아 케나텐과 네페르티티의 유일신 개혁 흔적을 더듬어 볼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케나텐이 배우려고 꿈꾸고 상상했던 인물, 모세의 그림자를 추측해 볼 것이다. 모세가 떨기나무 타는 불꽃 가운데 만나 뵈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억압 중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하셨다.
드영뮤지엄에서 혼합된 신들의 세계 이집트를 떠나 참 예배를 드리게 하셨던 유일 한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가 들인 시간도 물질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미국은 물론 세계로 번져나가는 혼합종교의 위기를 타개하는 “하나 되게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볼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말씀의 은혜에 흠뻑 젖는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과 요시야 때 일차 편집한 신명기역사서, 곧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를, 그리고 복음서 중에 하나, 말하자면 요한복음을 기도 중에 미리 읽고 간다면 이 모두는 정말 가능한 시나리오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이 없다(행 4:12). 구원의 길이 막혀 있던 인간 모두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다. 온 세상이 사망의 권세 아래 있어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죄의 삯은 사망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구원의 길”을 보는 사람이 맞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복음은 다른 종교와 문화 아래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초청하는, 대단히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참 사랑의 메시지다. 아케나텐은 배타적인 아텐 숭배를 위해 아마르나로 천도했다. 참 신이 아닌 유일신 개역은 자리를 옮기는 그 정도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온 세상을 품는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회복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우리를 파송하셨다. 인종과 민족, 나라와 문화를 따로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참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두 한 형제요 자매다.
신들의 전쟁 이후, 지금은 선교의 때다. 땅 끝으로 달려가는 복음 전도자의 발길이 분주하다.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피로 뿌린 씨앗을 이제 추수할 때다. 지금은 선교의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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