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의 여파로 이집트 내부에 유일신 개혁
모세의 여호와 신앙은 그 뿌리가 이집트내에 있어.
아스만(Jan Assmann)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이집트학 교수다. 그는 하바드대 출판사를 통해 <이집트인 모세>(Moses the Egyptian)를 출간했다. 1997년이었다. 여기서 그는 모세가 유일신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을 놓고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그는 모세가 역사적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성경 외에 이집트 안팎에 그를 언급한 자료가 없는 것이다.
모세는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인물이다. 말하자면 모세의 역사성 자체는 대단히 큰 의문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전통은 대단히 분명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아케나텐은 역사적으로 유일신 개혁을 실시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곧 역사에서 잊혀졌다. 의도적인 역사왜곡 과정을 거쳐 철저하게 고대 이집트 역사책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아니 아케나텐을 다뤘던 여러 페이지가 몽땅 찢겨져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두고 아스만은 모세와 아케나텐을 이렇게 비교한다. “모세는 기억의 인물이지 역사의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역사의 인물이지 기억의 인물은 아니다.”
여기서 아스만은 이집트의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을 모세와 비교한다. 그는 아케나텐을 제18왕조의 인물로, 모세를 제19왕조 때의 사람으로 본다. 이런 연대기적 전제를 근거로 모세는 결코 유일신 개혁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모세 앞에는 아케나텐이 있다. 모세는 아케나텐을 본 딴 것이다.
나는 그가 전제하고 있는 이집트 연대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세가 이끈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37년이다. 아케나텐이 집권한 해는 주전 1364년이다. 아케나텐이 파라오로 등극한 해는 출애굽 이후 73년이 경과한 때다. 따라서 모세가 아케나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케나텐이 모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이 출애굽 사건에 끼친 영향을 말하지 말고 출애굽 사건이 이집트에 남긴 영향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후폭풍 같은 임팩트를 남겼고, 그 결과 아케나텐의 유일신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것이다.
백 걸음 양보해서 모세가 아케나텐보다 후대라고 치자. 그렇다면 모세의 유일신 개혁은 이집트의 종교생활과 어떤 점에서든지 동질성이 더 강하다. 모세의 여호와 신앙은 그 뿌리가 이집트 내에 있다는 말이다. 치고 나갈 이유가 어디 있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 가나안으로. 그것도 사막을 통과해서!
출애굽이 이집트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중요하다.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뒤흔든 사건이 이집트 내부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다. 이집트 백성들이 보물을 꺼내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도왔는데, 그게 어떻게 쉽게 잊혀질 수 있을까?
결론으로, 출애굽의 여파로 이집트 내부에 유일신 개혁이 일어났다. 비록 그 개혁은 제3대에 이르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유일신 정신은 아주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다. 수면 밑에 잠수했을 뿐이다.
독일의 언어학자 자코(E. Sachau)는 1908년 이집트의 엘레판틴 섬에서 두 해 전에 이미 발견된 아람어 파피루스 기록을 검토하던 중이었다. 그때 그는 이 섬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이미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신전을 건설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예루살렘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거처인데 또 다른 신전을 그것도 이방인 지역에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 문제가 학자들 사이의 논란거리가 됐다. 내 추론은 이렇다. 이집트 내부에 존재하던 유일신 사상의 잔재다.
아니, 아케나텐 류의 유일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떠나고 나서 단지 “유일신”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 남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신앙” 자체가 남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집트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을 품었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스라엘만 빼내가고 초토화(쑥밭)하는 데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다녀간 이집트에도 구원의 손길이 펼쳐져 있다. 생각해 보자. 이집트 백성들은 소수의 정권 잡은 자들(파라오들)을 빼놓고는 대개 하나님의 뜻에 협조했다. 이집트 산파들이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했다. 이집트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귀중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대상은 넓다. 땅끝이다. 구원의 방법도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 예수님의 이름이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이 말씀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이집트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을 통해 그 사실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Nefertiti)는 아케나텐의 누이다. 그녀는 우선 미모로 유명하다. 그녀는 또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국이 그녀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녀는 종종 파라오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정치적 결정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직까지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관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거나 전차에 올라 적을 물리치는 모습 등이 그려진 것과, 심지어 남편과 나란히 서서 종교적 행사를 주관하는 그림 등에서 그녀의 세력을 가늠할 수 있다. 권력과 미모를 동시에 지닌 그녀는 생전에 여신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그녀는 패션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대에 유행하던 복장을 입었다.
아케나텐은 통치 말년에 스멘크카레(Smenkhkare, 주전 1351-48)과 공동통치 했다. 스멘크카레, 그는 누구인가?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아케나텐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네페르티티가 바로 스멘크카레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발견된 미이라의 관이 여성용이라는 것이었다. 그 관은 독수리 깃털로 장식되었다. 독수리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을”(창 1:2) 때, 그 이미지는 독수리의 비행이었다. 이집트 내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 그 관은 심하게 물 때문에 부패했다. 누군가 파괴할 목적으로 일부러 수로를 댄 것이다! 틀림없이 투탕카문을 배후에 조종했던 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름을 스멘크카레로 바꾸고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통치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18대 왕조는 두 명의 여자 파라오를 낳은 것이다. 하나는 제6대 핫셉수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11대 스멘크카레다. 스멘크카레의 통치는 겨우 2-3년으로 대단히 짧았다.
이후 권력은 아케나텐의 첩의 아들인 투탕카문(Tutankhamn, 1347-37)에게 넘어갔다. 투탕카문 때 아케나텐이 세운 대부분이 파괴되고, 이집트의 오랜 전통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렇게 보면 스멘크카레를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로 보아 무리가 없다. 부부의 공동통치로 세운 것들이 모두 서자(庶子) 투탕카문의 통치 때부터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케나텐의 유일신 개혁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모세와 비교해 보자. 아케나텐의 아텐/아톤은 태양신이다. 다른 신으로도 “번역”(飜譯)이 가능한 신이다. 새삼스럽게 파괴적 능력이 없다.
이쯤해서 “신명 번역”(神名飜譯)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스의 많은 신들은 로마의 다른 신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헤라(Hera)는 로마의 유노(Juno)다. 헬리오스(Helios)는 솔(Sol)이다. 에로스(Eros)는 큐피드(Cupid)다. 오스(Eos)는 오로라(Aurora)다.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베누스(Venus), 곧 비너스다. 아폴론(Apollon)은 포에부스(Phoebus)다. 곧 아폴로(Apollo)다. 아테네(Athena)는 미네르바(Minerva)다. 이제 묻자. 모세와 이스라엘이 섬긴 여호와 하나님이 이전의 어떤 신의 번역인가? 다른 한편,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언어로 번역된 일이 있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대의 어떤 신과도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신명(神名)은 다른 어떤 언어로도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다른 모두는 신이 아니다.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생명을 주신다. 다른 신들은 스스로도 생명이 없다. 그러니 생명을 창조하거나 주거나 할 수 없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 20:3; 신 5:7)는 계명은 어떤 종교에서 그저 “유일신을 섬겨라”고 주장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을 수 없다. 여호와는 여호와시다. 다른 그 어떤 신으로 번역(飜譯)되거나 치환(置換)될 수 없다. 따라서 모세의 여호와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신교 사회인 이집트 컨텍스트에서는 출애굽함으로써만 그 예배적 실천이 가능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이집트 내에서 천도(遷都)함으로써 가능했었다. 아텐은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금문교회 도서관에 투탕카문 동상이 있다. 중국에서 만들었다. 허리에 양손을 대고 가슴을 넓게 연 전신(全身)이다. 온 세상을 향한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젊은이다. 투탕카문, 그는 정말 젊은 파라오였다.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년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제작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작고 조잡한 무덤에 안장한 사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예술가들의 조명을 받고 있는 투탕카문의 모습은 사실은 조작된 것이다. 그런 자신감과 그런 파워는 부여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확실히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섭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전왕 아케나텐과 스멘크카레의 정치-종교적 성과물들을 대부분 없애버렸다. 투탕카문 자신은 비록 서자의 신분이기는 아지만 분명히 아케나텐의 아들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정책을 그렇게 과감하게 부정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나이라는 사실 외에 섭정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투탕카문은 아케나텐과 소실 키야(Ki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키야에 대해서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관이 의도적으로 심하게 손상되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케나텐의 관으로 착각하고 칼 같은 것으로 마구 그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케나텐의 소실이며 투탕카문의 어머니인 키야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카이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키야의 두상은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와 비교하기 어려운 것은, 둘 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은 미인들을 정실과 소실로 얻었다. 그는 네페르티티 사이에 난 딸 안케세나문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그의 아내는 그와 배 다른 누이였다.
투탕카문의 섭정자들은 아이(Ay), 호렘헵(Horemheb), 마야(Maya) 등이다. 이들은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멤피스(Memphis)로 옮겼다. 여기서 아케나텐 때 파괴했던 신전들을 복구했다. 테베(Thebes)는 다시 한번 이집트의 종교 센터로 복구되었다. 아문-라(Amun-Ra)는 신들의 신으로 다시 추앙되었다.
투탕카문이 죽고 나자 실권자였던 아이(Ay)가 파라오로 등극했다. 그는 아케나텐의 삼촌으로, 투탕카문의 서기관 출신이었다. 그는 투탕카문의 미망인과 결혼하고 파라오가 되었다. 호렘헵(Horemheb)은 군대의 장관이었다. 그는 아케나텐 때부터 군대에 입문, 고위직에 올랐다. 아이(Ay)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했다. 실제적인 권력자였는데, 아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파라오에 올랐다. 제18대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였다. 그가 파라오로 집권하면서 이집트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아쉽게도 호렘헵은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그것이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여는 하나의 계기를 준 것은 확실하다. 마야는 투탕카문의 재무담당관이었다. 그는 아이나 호렘헵과 달리 파라오에 오르지 못했다.
투탕카문, 그는 아마르나 세대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섭정들의 손 아래서 채 정치를 알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실제로 이룬 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시대적 의미”를 지녔다. 말하자면 이병주가 <지리산>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함으로 일하는” 인간형이었던 셈이다. 아케나텐이 다신교 사회를 일신교 사회로 개혁하여 고대 이집트 역사의 수레바퀴 방향을 돌려놓았는데, 투탕카문 때 그 바퀴가 다시 제 궤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이집트 내에서 그 수레는 결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어떤 중요한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소위 “회복의 돌비”(Restoration Stela)가 그것이다.
남신들과 여신들의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엘레판틴부터 델타의 습지대까지 이르도록
그들의 거룩한 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경이다.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엉겅퀴가 높이 자랐다.
그들의 성소들은 전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렸고
그들의 거처들은 짓밟혀 아예 길이 되고 말았다.
그 땅은 질병의 공동묘지가 되었고
그 신들은 이 땅을 버리고 말았다.
어떤 군대를 시리아로 보내어 이집트 경계를 넓힐 목적이었다면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신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도
그 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신을 그렇게 찾았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은 지친 몸과 함께 약해져 갔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창조되었던 그것을 파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케나텐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이집트의 운명을 새긴 것이다. 이 정서는 통치자들은 물론 백성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졌고, 이집트는 두 번 다시 아케나텐 같은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엘레판틴에 “여호와의 신전”이 발견되기까지. 그러나 그것도 그 배경이 모호하다.
비슷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유다의 왕 요시야(주전 640-609)가 생각난다. 여덟 살 때 왕이 된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개혁했다. 투탕카문은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어쩌면 이것은 당파주의의 다이나믹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시야는 지혜롭게 그를 극복했고 투탕카문은 그 희생자로 남았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당파주의의 극한 단련을 받은 나라에서는 요시야 같은 지도자가 날 수 있지만, 이집트 같은 강대국에서는 그런 묘수가 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당파주의라는 정치적 장치 말고, 말씀의 능력을 말해야 한다. 요시야는 말씀을 발견했다. 그러나 투탕카문에게는 말씀이 전달되는 은혜가 없었다. 투탕카문의 비극의 열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설령 아케나텐의 유일신 개혁이 그 강도(强度)에 있어 모세의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개혁과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해도 적어도 이집트 내에서 그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러므로 투탕카문은 아케나텐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전력을 다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라져 갔던 것이다! 본래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아케나톤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허수아비였던 셈이다.
조은석 목사(금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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