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나라 안팎의 아우성에도 별 자성의 빛을 안보였던 조지 W. 부시가 퇴임하면서 뼈아프게 후회를 자인했던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역사적 유산’으로 남기기 원했던 이민개혁의 실패였다. 2004년 재선된 직후 곧바로 이민개혁에 착수하지 않고 소셜시큐리티 개혁을 추진한 것은 자신의 큰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소셜시큐리티 개혁에 실패한 부시가 이민개혁에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정치적 자산이 소진된 후였다. 극우그룹은 선동적인 반이민 열기로 공화당의 내분을 초래하면서 결국 개혁안을 죽여버렸고 보수진영의 극단적 강경론에 분노한 라틴계 유권자들은 2006년과 2008년 선거에서 공화당에 등을 돌렸다.
요즘 이민사회의 절박한 기대와는 반대로 점점 뉴스에서 사라져가는 이민개혁안을 보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칫 부시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닐까,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힘들다. 오바마의 이민개혁 공약이 계속 말로만 다짐될 뿐, 영 추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다. ‘5월에 이민개혁 구상을 밝히고…’라며 백악관 보좌관이 두 달여 전 공개한 일정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다행히, 마침내 오늘 백악관에서 이민개혁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것도 6월8일에 잡혔다가 17일로, 다시 25일로 두 번이나 연기된 끝에 - 이민사회의 실망과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 마련된 미팅으로 대통령과 연방의회 이민관련 양당 지도부가 참석한다. 그런데 백악관과 상원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상원은 금년 내 성사를 강조하는데 백악관은 별로 동조하는 기색이 아니다.
사실 이민개혁 실현을 위한 정치적 환경으로 보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친이민’ 민주당이 정계를 장악한 초기인데다 좌파 노조와 중도우파 기업주들이 함께 이민개혁을 찬성하며 지지 텐트 속으로 들어왔고, 6월초엔 이민·종교·노동관련 700개 단체들이 워싱턴에 모여 지지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2년 전까지 극성맞게 들이대던 반이민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보다 이민자의 대표그룹 라틴계가 새로운 정치파워로 급부상했다. 2008년 투표에 참가한 라틴계는 1,100만명으로 추산된다. 2004년 760만명에서 급증했다. 접전 지역 4개주에서 승리를 결정지은 라틴계의 압도적 지지가 오바마 당선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이들이 오바마에게 이민개혁 공약의 빠른 성사를 촉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만사에 행보 빠른 오바마팀이 이 문제에선 영 소극적이다. 로버트 깁스 백악관 대변인의 설명엔 오늘 회의의 의미도 애써 축소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 “이번 미팅은 그동안 계속해온 대화의 한 부분일 뿐이다…대통령은 금년 하반기에 공식논쟁을 시작하기 희망하지만 앞일을 예언할 수는 없다” 고의는 아니겠지만 이민사회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물론 오바마팀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될 만큼 장애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서민들의 생계가 힘들어진 불황의 한복판에서 이민개혁 추진은 별로 바람직한 과제가 아닐 수도 있고(다행스럽게 실업자가 속출하는 경기침체는 아직 반이민 기류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인 실업자들이 불법체류자들의 농장노동이나 일용직 노동은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표밭을 의식하는 의원들의 지지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우선 오바마 백악관은 양손에 가득 쥔 당면 과제들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다. 경제회복과 함께 이란과 북한 등 국제관계가 난제로 떠올랐고 오바마가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헬스케어개혁은 의회에서의 일대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민개혁안이 통과하려면 상원에서 60표, 하원에서 218표가 필요하다. 현재 민주당은 상원에서 무소속 포함 59석, 하원에서 256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다. 불법체류자의 ‘사면’은 지지 못한다는 중도파가 50여명에 달한다. 결국 부시때 공화당 내분이 이민개혁안을 부결시켰듯이 오바마의 민주당 역시 내분에 시달릴 위험이 다분하다.
라틴계 표밭이 넓어진 네바다에서 2010년에 재선을 치르는 해리 리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개혁안의 금년 상원통과를 다짐하지만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 접전지역의 반이민 정서도 감안해야하는 하원과 백악관은 솔직히 이민개혁을 선거후로 미루고 심은 심정일 것이다.
상원의원 시절부터 이민개혁을 적극지지해온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지금 변심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급한 다른 불부터 꺼놓고, 중간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난 후에 성사시키려는 의중은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벌써 일부에선 ‘오바마의 밀월은 끝났는가’가 화두로 떠오른다. 오바마의 지지도 역시 차츰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오바마가 ‘준비’를 마치고 이민개혁에 돌입할 무렵 그의 정치적 자산도 함께 바닥나 버린다면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의 백악관 회의에서 이런 불길한 예감을 씻어줄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일정이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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