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 골짜기와 길거리를 뒤덮은 싸리꽃. 절로 고향의 추억이 떠올라 피곤함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충청북도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영동군 입구 표지판
과일가게 “학산포도 미국까지 소문” 자랑
“막걸리 한잔 하세요” 농부들 인심은 여전
국토종단 열 사흘째다. 오늘은 집사람의 친구와 같이 걷게 됐다. 함께 걷자고 서울에서 새벽차로 내려온 고등학교 동창이다.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
무주읍내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영동까지 거리를 물으니 자동차로 20여분 걸린다고 한다. 차로 20여분이면 갈 거리를 우리는 하루 종일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에 4킬로미터, 십리 정도를 걷고 있으니, 이를테면 예전의 한 시간이 지금은 4분으로 줄어든 셈이다. 세상이 참 많이 편해졌다.
그러나 걸어보니 알겠다. 자동차를 타면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저 길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봄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된다는 사실을.
날씨가 흐리다. 어제 일요일을 쉬었더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오산 삼거리에서 4차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2차선 지방도로를 가는 것보다 거리는 짧아지지만 단조롭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고 여행의 맛도 줄어든다. 시멘트 길을 오래 걷다보면 발이 팍팍하고 무릎도 부담이 간다. 아스팔트길을 가다가 흙길을 걸으면 양탄자를 걷는 것처럼 편안하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압치 터널을 지나니 충청북도 영동군이다. 영동 특산물인 포도 상징물이 보인다. 걸으면서 보니 포도밭이 많기도 하다. 산 벚꽃이 만발하여 골짜기 마다 환하다. 길가 흐드러지게 핀 싸리 꽃에 눈이 부시다.
충북 영동군 특산물인 포도 상징물.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당도가 높고, 맛이 좋아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학산 초등학교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가게 주인이 학산면 포도는 맛이 좋아 가락동 시장은 물론 미국에서도 유명하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내가 미국에서 온 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언젠가 맛있게 먹었던 그 포도가 이곳 학산면 포도였나 보다.
비비빅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팥 아이스크림이다. 걸어가면서 상점이 보이면 들어가 비비빅 아이스케익 사 먹는 데 재미를 붙였다.
아내가 가만히 웃는다. 꼭 어린애 같다고 말하고 싶은가 보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자전거에다 푸른색 아이스케익 통을 싣고 “얼음과자, 아-이스 깨끼”를 외치며 장사가 오면, 헌 고무신이나 병 같은 것을 가지고 달려갔다. 그 때도 앙꼬 아이스깨끼를 나는 참 좋아했다. 보통 얼음과자에 비해 좀 비싸기는 했지만 한 입 베어 살살 굴리면 사락사락 녹아들던 맛이라니! 냉수에 사카린을 타서 마시던 시절, 그 시절이 눈앞에 삼삼하다.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세요!” 멀리 건너편에서 밭일을 하다가 새참을 먹고 있던 농부들이 손짓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 농촌의 인심이다. 달려가서 한 잔 하고 싶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영동에 도착하려면 아무래도 길을 재촉해야 할 성싶다. 고맙다는 말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지나치고 나니 막걸리 생각에 군침이 돈다. 막걸리. 어릴 적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 오면서 홀짝홀짝 주전자를 축내던 일. “술, 인생이 괴로워, 너를 마신다.” 학사주점 벼람박에 갈겨 써 놓았던 낙서도 생각난다. 주막집 주모가 따라주는 텁텁하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들이킨 다음, 김치 한 가닥 안주삼아 입술을 쓰윽 훔치고 나오던 맛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
길가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 사람들이 몰래 버리고 간 것이다. 밤길에 택시를 탔을 때 운전사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통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나아져 갈 것이다.
초등학교 앞에 걸린 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괴롭힘이 없는 학교, 우리함께 만들어가요!” -학교폭력 자진 신고기간(09년 3월11일-6월15일) 미봉초등학교 -. 한갓진 시골 초등학교에 이런 현수막이 걸릴 만큼이면 아이들 사이의 왕따 현상이 심각한 수준인가 보다.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아닌 초등학교에까지 학교폭력 자진 신고기간을 설정할 만큼 교육현장이 피폐해졌다는 이야기 아닌가. 각종 대안학교가 생겨난다는 이유를 알겠다.
땅거미가 질 무렵 영동읍에 도착했다. 친구는 서울행 밤 열차를 타고 떠났다. 새벽에 서울을 출발하여 온종일 함께 걸어 준 저 친구, 한 밤중에나 집에 도착할 것이다. 며칠 동안은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에게 저런 친구인 적이 있었던가 되돌아본다.
밤이다. 책을 들었다.
졸린 눈으로 읽고 있는데 한 구절이 번뜩 눈에 들어왔다. “어제가 불행했던 사람은 십중팔구 오늘도 불행하고,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내일도 불행합니다.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밤’이 있습니다. 이 밤의 역사는 불행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밤의 한복판에 서 있는 당신은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을 위하여 꼿꼿이 서서 밤을 이겨내야 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다.
어둠이 깊어간다. 누군가에게 이 밤이 불행의 연쇄를 끊는 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일은 경상북도 상주를 향한다.
정찬열
도보 국토 종단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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