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과 중앙정보국(CIA),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9.11사태 발생 1년 후 테러용의자 신문관련 대의회 브리핑에서 CIA는 “물고문을 행한 바 있다”라고 밝혔다는데 브리핑을 받았던 펠로시의 기억은 다르다. “물고문이 합법적이라는 판정은 받았으나 행하진 않았다”라고 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벌써 한 주 넘게 물고문을 둘러싼 진실공방전이 워싱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 펠로시와 CIA가 굽힘없이 맞서고 있는 곁에선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뛰는 공화당과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민주당의 응원전도 못지않게 치열하다.
보수파들의 요구처럼 의장 사임으로까지 번질 기미는 아직 없지만 펠로시의 입장이 전례 없이 궁색해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늘 화사한 아르마니 정장의 빈틈없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워싱턴을 휩쓸던 미국의 첫 여성 하원의장 펠로시가, 그동안 보수진영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꿈쩍 않던 난공불락 터프한 진보의 기수가 처음으로 난감한 곤경에 처한 것이다. CIA보다는 펠로시에게 더 강한 불신의 눈길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방전의 시작은 지난 달 부시 정부에서 행해진 고문관련 법무성 메모 일부가 공개되면서 부터다. 진실규명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펠로시를 위시한 민주당 의원들이 앞장섰다. 그러자 공화당 중진의원이 보수신문 기고를 통해 지적했다 : 7년전 많은 민주당 의원들이 고문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고 당시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민주당, 당신들도 당당할 수만은 없다는 경고였다.
실제 공개된 CIA 문서엔 40회 브리핑을 통해 누가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의 기록이 남아있었고 그 기록의 맨 위에 올라있는 의원 중 한명이 펠로시였다. 문제의 2002년 9월4일 브리핑에는 하원정보위 소속 2명의 의원만 참석했다. 위원장이었던 포터 고스 공화당의원과 정보위의 민주당 대표 펠로시였다. CIA의 기록이 맞는다면서 펠로시의 주장을 일축한 고스는 당시 펠로시는 물고문에 대한 반대는커녕 CIA에게 그 정도로 충분하냐고 오히려 물었다고까지 주장했다. 5개월 후 펠로시는 2003년 2월의 브리핑에 참석한 보좌관을 통해 물고문 자행사실을 보고받았으며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된 펠로시 대신 정보위에 들어간 제인 하먼의원이 물고문 항의서한을 보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사태가 이쯤되자 거짓말쟁이 내지 위선자로 몰리게 된 펠로시는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필요를 느꼈다. 지난 주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런데 그만 이게 ‘재난’에 가까운 미디어 서커스가 되고 말았다. 원래는 준비된 성명만 읽고 끝내려했는데 퇴장하는 펠로시를 큰소리로 불러세운 기자들이 물었다. “CIA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연단으로 되돌아와 뒤섞인 메모지에서 답변을 찾으려고 허둥대는 모습은 평소 병적일 만큼 준비에 완벽한 펠로시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침착을 잃은 펠로시의 대답은 ‘폭탄’이었다. “그래요, CIA는 의회를 오도했습니다” CIA가 고의적으로 의회에 거짓 브리핑을 했다? 그건 ‘범죄’였다.
이 시점에서 공방전에 뛰어든 것이 리언 파네타 신임 CIA국장이었다. 펠로시에겐 같은 캘리포니아 하원 출신 십수년 동지이지만 그에겐 ‘새로운 내 집’을 지켜야하는 의무가 있다. 가뜩이나 CIA 내부에서 아웃사이더로 눈총을 받던 그는 “의회를 오도하는 것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다”라면서 CIA 기록의 신빙성을 강조했다. 펠로시에 정면으로 맞서며 부하들을 두둔한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백악관은 입을 다물었고 공화당은 오랜만의 호재에 쾌재를 불렀다. 존 베이너 하원원내대표,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부시의 브레인 칼 로브 등 보수의 입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 하원의장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언제까지 말 바꾸기를 계속할 것인가, 고문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그건 공범 아닌가, 펠로시는 거짓말쟁이인가, 위선자인가, 민주당은 ‘펠로시게이트’를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가, CIA와 하원의장의 불화를 방치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안보관은 무엇인가, 펠로시는 사과하라, 펠로시는 사임하라…
민주당도 CIA의 갖가지 실수를 들이대며 펠로시 지지 응원전을 펼치고 있지만 공화당의 공격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공방전 초기에 융통성 있게 조기진화 했어야 한다는 자성론마저 나오고 있다.
고문을 단죄해야 할 펠로시는 고문 논쟁의 중심에 던져졌다. 쟁점도 원래의 불법 고문과 그 책임자 처벌에서 벗어났다. 당파적인 진실공방전으로 변한 것이다. 파네타 국장이 엊그제 CIA를 정치화 말라고 경고했지만 공화당의 아우성을 잠재우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펠로시 본인은 물론, 민주당에게도,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헬스케어, 에너지, 교육, 이민에 이르기까지 풀어야 할 수많은 개혁 어젠다가 산적한 의회와 백악관이 엉뚱한 비생산적인 싸움에 발목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메모리얼데이 연휴를 시작으로 의회는 1주간의 휴회에 들어간다. 그 1주일이 물고문 논쟁의 열기를 식히는데도 도움이 되기를 펠로시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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