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시아인들 미국 이민길 막혀
필자가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난 해가 1959년인데, 그때만해도 유학생마다 전송객이 너무 많아서 버스를 대절해서 김포공항까지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만큼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막중대사이고 경사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포 공항에는 미군이 남겨놓은 콘세트(간이병사) 1개에 법무부 직원 1명과, 세관 직원 1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출입국자의 수가 관리 두 명의 손으로 충분히 감당이 될 정도로 적었다는 뜻이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몇시간 머물고 항행을 계속하였는데, 거기서도 전송 절차가 적지 않게 요란한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외국 출장을 떠나는 직원 1명을 위해서 수십 명의 직원이 공항에 나와서 정렬하고 서있었고, 출장직원은 부동자세로 그들 앞에 서서 잘 다녀오겠다는 일장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나자 전 직원이 만세 삼창으로 답을 했는데 여기저기 몇 군데서 만세삼창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미국에 온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남다른 일로 여겨졌었는데, 지금은 LA에 가족이나 친척 한두명 없는 한국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됐다. 출입국도 국내 여행이나 마찬가지로 단출해졌다.
한인의 미국 이민사(1903-2009)가 100년이 넘는다고는 하지만 그 동안에 단절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실재적으로는 47년(1903-1905, 1965-2009)밖에 되지 않는다. 1905년부터 1965년까지는 한인의 미국 이민길이 막혀 있었고, 1945년 해방과 같이 소수의 유학생이나 수련의(修練醫) 정도가 도미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넉넉치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유학생의 수를 대폭 줄여야 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유학생 선발고시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어려운 시험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유학생의 수마저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한인 교포의 수는 늘어날 길이 없었다.
미국의 동양인 이민 선조는 중국인이다. 청조말엽에 쇄국정책을 풀기 시작하면서 1757년 남부의 광동(廣東)을 중국 유일의 무역항으로 개항했는데 이를 계기로 광동인들은 외항선을 통하여, 혹은 외국 선박의 승무원으로 채용이 돼서 외국 출입을 하게 되었다.
광동항은 세계각지를 순항하는 선박이 들락날락 하면서 전하는 나라밖 세상물정을 받아들이는 초소 역할도 담당했다. 아시아에서 캘리포니아의“황금 붐(gold rush)”을 제일 먼저 알게 된 나라가 중국인데, 역시 광동에 전파된 소문이 근거였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금광붐”은 세계각지의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꾼을 미국에 불러들였는데 중국의 광동인이 빠질 리가 없었다. 1848년의 일이다. 이때 미국에 발을 디딘 중국인들이 동양 이민의 선조이다.
금광 붐이 막을 내리자 중국인들은 미국 횡단 철도의 공부(工夫)로 전환되었는데 일부는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농부로 생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한 사탕수수밭 주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도 일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1903)에 들어온 한인 이민이 미국 한인 이민의 선조들이다.
이때 이후로 캘리포니아에 이어 하와이가 동양인 이민의 정착지가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 이민 온 중국인은 118,000명, 일본인은 180,000명이며 한인은 7,200명(1903-1905, 이후는 이민 중단)이었다. 동양인 이민은 시초에는 근면하며 정직하고 충실하다고 해서 좋은 평을 받았지만 19세기 말엽에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동양인들은 (특히 중국인) 이민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을 내 나라로 삼겠다는 마음가짐이 없고, 다른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동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모여 살며 이방인 탈을 벗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인종이 못 된다는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동양인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황화풍조(黃禍風潮)”라고 하였다. 영어로는 Yellow Peril이라고 한다. 황색인종이 미국 사회의 화근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급기야는 황색 인종의 이민을 법으로 막는 선으로까지 연장이 되었던 것이다. 시작은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다. 중국인 이민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법이다. 1907년(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시대)에는 미국 국무장관과 일본외상이 서로 구두로 일본인 이민 중단 약속을 하였다. 역사에서는 이 약속을“신사 협정(Gentlemen’s Agreement)”이라고 한다. 문서상의 협약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대미 이민 여권을 일체 발급치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한인 일꾼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이 임금인상과 대우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할 때에 파업을 방해하는“스트라이크 브레이커(strike breaker)”로 이용되고 있다고 해서 빈축을 사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일본인 일꾼들은 일본정부에 진정하여 일본정부로 하여금 한국 조정에 압력을 가해서 이민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1905년의 일이다. 이때는 이미 대한 제국에서 일본정부의 관정(關政)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기에 그 진정은 받아들여졌다.
1917년에는 Asiatic Barred Zone이라는 규제조항이 발표 되었는데, 이민을 받아들이는 대상국가에서 아세아의 모든 국가를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이 규제는 1924년에 National Origins Act라는 법으로 시행이 되게 되어 아세아인의 미국 이민길은 완전히 막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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