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뒷전으로만 밀리던 ‘이민’ 이슈가 드디어 지난 주 앞줄로 나왔다. 이민단체들조차 ‘경제’에 치여 눈치만 보던 중이었다. 뉴욕타임스가 9일 백악관의 부보좌관 세실리아 뮤노즈의 말을 인용, 오바마의 이민개혁 일정을 보도한 것이다. ‘5월 이민개혁 구상을 공식발표하고, 여름 중엔 민주·공화 양당의원들과 이민단체 관계자들을 포함한 초당적 워킹그룹을 소집하여 빠르면 9월부터 법안 토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 뮤노즈가 밝힌 전부다.
이민개혁법안 통과는커녕 상정 약속도 아니었다. 그저 개혁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대통령의 의도를 전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민자 커뮤니티는 환호했다. “금년에 포괄적 이민개혁안 통과를 약속한 리더십에 박수갈채를 보낸다”는 기쁨에 찬 이메일이 쫙 돌았다.
백악관의 후속반응은 좀 달랐다. 어쩐지 김빼기의 기미가 완연했다. 대변인 닉 샤피로는 뮤노즈의 말에 대해 “그건 뉴스도 아니다. 대통령은 이민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년 후반기에나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늘 말해왔었다. 지금은 경제가 우선이다. 새로운 건 없다”고 강조했다. 다른 참모들의 말도 다르지 않았다. “캠페인 때부터 계속 해온 말이다, 금년내 통과를 약속한 적 없다, 법안통과 압력도 넣지 않을 것이다, 이민은 헬스케어나 에너지만큼 주요이슈는 아니다…”
오늘 멕시코를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민문제에 관한 새로운 사항은 나올 것으로 기대하기 힘들다.
취임 첫해에 이민개혁안 통과는 오바마의 선거공약이었고 오바마의 당선엔 히스패닉계를 비롯한 이민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도 한몫을 담당했다. 물론 경제가 최우선 과제임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민자 커뮤니티에서도 넘버원 이슈는 이민개혁이 아닌 경제다. 그러나 경제를 제외한 오바마의 우선과제들이 발표되면서 이민관계자들은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헬스케어, 교육, 에너지 등 주요현안들이 차례로 이어지는데 ‘이민’은 계속 실종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상원시절부터 이민개혁을 적극 지지해왔다. 2007년 극단적 당쟁으로 죽어버린 포괄적 개혁안에도 찬성표를 던졌었다. 상하 양원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의회도 이번엔 이민개혁안 통과를 벼르고 있다. 이민개혁 실현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었다. 경제에 발목이 잡히면서 거론하기조차 조심스럽게 된 것이다.
개혁안은 불법체류자의 조건부 신분합법화와 임시체류 단순노동자 초청, 앞으로의 불법이민을 사전 방지할 단속강화 등을 골자로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안의 내용에 앞서 타이밍이 먼저 쟁점으로 등장했다 : 지금은 이민개혁을 추진하기에 적절한 시기인가.
찬반주장도 격렬하다. 한쪽에선 전면개혁이 시급하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다른 쪽에선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시기라고 아우성이다.
“직장 잃고 집 잃고 고통 받는 미국인들에게서 불체자 ‘사면’과 임시노동자 초청으로 일자리를 더욱 빼앗겠다니 정신 나간 정치가가 아니라면 지금 할 소리가 아니다. 여론의 분노폭발이 두려워 오바마 백악관도 이민에 손대기를 꺼리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반이민 단체들은 공격한다.
불체자 신분합법화는 경제에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가 된다고 이민단체들은 반박한다. 사실 그늘에 숨어살던 그들이 양지로 나오면서 집도 사고,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세금도 내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여러 학술보고서가 확인시켜준 지 오래다.
이민의 나라에서 이민제도가 작동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는데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개혁의 시기에 좋은 때와 나쁜 때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전 오바마가 공개적으로 인정했듯이 이민은 “정치적 분노를 초래하는 감정적이고 논쟁적인 이슈”다. 천만이 넘는 불체자를 모조리 추방하자는 극단적 주장이 합리적인 개혁안의 통과를 저지시킬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정치가들이 이성에 따라서만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여론의 정서를 다스려가며 실용적 개혁의 당위성을 설득시키기 위해선 대통령의 용기있는 의지가 필요하고, 이민커뮤니티의 한결같은 지원은 정치적 역풍에도 맞서는 대통령의 용기에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새 백악관에는 이민개혁을 지지하는 2만여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새 의회엔 4,000여통의 팩스가 들어왔다고 한다. 24만명의 한인들을 포함해 그늘에 숨어사는 1,200만명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코리안 커뮤니티도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야 할 때다.
박록/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