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영된 영화‘쇼퍼홀릭’의 주인공 레베카는 쇼핑중독자로 데이트하기보다 쇼핑을 더 즐기는 여자다.
그녀는 ‘세일’이라는 단어만 보면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돈도 없으면서 겁없이 카드를 긁어대고, 카드 한도 초과를 막아내기 위해 다른 카드로 ‘돌려 막기’를 하면서도 쇼핑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왜 자꾸 쇼핑을 하느냐는 물음에 레베카는 예쁜 옷을 입고 멋진 구두를 신으면 자신감과 만족감이 생긴다고 답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위축된 심리와 상실감을 소비를 통해 채우려드는 여자다.
관객들은 그녀의 못말리는 쇼핑 중독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켜본다. 그러나 영화 전반부에 ‘무대책 쇼핑’ 행각을 벌이는 레베카의 모습에서 대다수의 여성 관객들은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기자 역시 ‘쇼핑광’ 레베카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전 보았던 뮤지컬‘Shopping’역시 ‘쇼퍼홀릭’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뮤지컬 배우들은 적절하게 과장된 연기로 끊임없이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면서 순간적인 재치와 번뜩이는 위트로 현대사회의 소비문화를 코믹하게 풍자했다.
쇼핑에 관한 이들 두 편의 영화와 뮤지컬은 모두 ‘소비사회’의 보편적 단면을 유쾌한 웃음으로 포장해 보여주지만, 웃음을 빚어내는 조롱과 풍자는 신랄하고 날카롭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레베카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의 소비심리 속엔 레베카가 버티고 있다.
한예로 홀세일마켓 코스코에 갔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꼭 필요한 물건만 집어들고 나오겠다던 당초 결심은 개당 혹은 그램당 얼마라는 비교가격표를 보는 순간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코스코에서 6년치 화장지를 샀다는 뮤지컬의 대사는 그리 과장스레 들리지 않는다. 함께 학교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농담처럼‘한국사람들은 코스코를 너무 좋아한다’는 말에 그냥 웃고 넘어간 적이 있는데, ‘세일’에 대한 집착은 꼭 한국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합리적 소비심리에 곧잘 ‘독침’을 가하는 나 역시도 비판대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잠깐 화장실을 가려고 들렸던 백화점에서 이번주 프로모션으로 나온 화장품 기획 세트에 그만 또 눈길이 가고 만다. 새로 나온 파우더와 브러쉬를 함께 산다면 예쁜 파우치를 덤으로 주는 행사에 혹해서 나도 지름신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색조화장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내가, 선블럭과 립글로즈만으로 하루의 모든 메이컵을 완성짓는 내가 그 파우치 하나에 혹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출을 한다.
뮤지컬과 영화를 보며‘쯧쯧’ 하는 혀차는 소리에 가세했던 나도 별 수 없이 상업적 소비문화 세계의 충직한 시민이다.
가격비교하며 인터넷에서 찾은 구두는 텍스 프리라는 문구에 혹해서 사게 된다. 세일품목을 뒤지느라 늦은 새벽까지 구부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을 들여다보느라 어깨가 쑤시고, 수면부족으로 피부가 까칠해진 건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 탓으로 돌려버린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시간의 가치에 대한 계산은 그냥 넘겨버린 채 오직 텍스 프리로 싸게 샀다는 만족감에 빠져 히히덕대는 바보가 또한 오늘의 나다.
가끔 쇼핑이 주는 순간적 쾌락 뒤에 몰려드는 정신적 공허함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주기도 한다.‘어찌하랴 잘 하지도 못하는 화장이래도 마치 그 브랜드 제품만 사면 내가 무슨 화려한 패션리더라도 된 듯 기분이 좋은걸’ ‘시간활용 제대로 못하고 피곤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낸 구두 하나로 봄 처녀 기분 완벽히 내는 걸.’
혹시 내가 했던 것처럼 누군가 나를 비판한다면 살포시 웃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소비는 미덕, 우리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려면 적.당.한 소비는 필요합니다’라고.
영화‘쇼퍼홀릭’은 충동적 소비를 꼬집고 있지만, 그 결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카드를 쓴 뒤 날아오는 건 짧은 반성후 모든 게 척척 해결되어가는 영화속 레베카의 행복이 아니라 늘어나는 빚과 신용불량 딱지뿐 이다.
관람 전 봤던 리뷰에서 이런 글들이 있었다.
‘가볍게 웃고 넘기기 좋은 영화다. 쇼핑에 관한 유쾌한 뮤지컬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내 평가는 조금 더 후하다.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주체적이지 못한 상업적 사회의 노예가 되어 맹목적인 소비를 해왔던 것을 반성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했다는 점에서는‘쇼퍼홀릭’과‘쇼핑’은 후한 점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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