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국제외교무대에 정식으로 첫 선을 보이고 있다. 새 대통령의 데뷔전치고는 강행군 일정이다. 31일 새벽 워싱턴을 출발한 후 8일간 5개국을 순방하며 런던의 G-20정상회담을 비롯, 나토 창립기념행사, 유럽연합 의장국 방문, 무슬림 세계와의 접촉 등을 통해 11개국의 17명 정치지도자들과 개별면담을 갖는다. 악수하고, 차 마시고, 대화하고, 사진 찍으며 상대의 역량과 속마음을 타진해 보는 실전의 기회다.
지난 대선 캠페인 막바지에서 오바마의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은 “세계는 곧 젊고 경험없는 대통령을 시험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었다. 그때의 ‘곧(soon)’이 바로 ‘지금(now)’이라고 1일 월스트릿저널은 보도했다. 세계 경제위기 예방위한 국제금융규제가 강력하지 않으면 회담장 퇴장을 불사하겠다는 프랑스 대통령의 위협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이 대립하는 틈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시도에 이르기까지 각국정상들의 ‘오바마 테스트’ 기미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오바마가 러시아와 중국의 정상들과 회담하며 북한 비핵화를 위한 공조를 재 다짐한 어제는 북한도 ‘오바마 테스트’ 대열에 합류했다. 발사준비중인 장거리 로켓에 때 맞춰 연료주입을 시작한 것이다. 비핵화 합의를 어길 경우 강력제재를 천명해온 새 대통령 오바마의 대북정책 의지를 시험해보려는 의도가 훤히 보인다.
국제문제 경험이 부족한 미국의 새 대통령을 시험해보려는 노련한 외국정상들의 시도는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60년대 젊은 케네디를 얕잡아 보며 첫 회담에서부터 거칠게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던 후르시초프도 그랬고, 93년초 도꾜 G7정상회담에 참석했던 클린턴도 ‘미숙한 신출내기’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각국정상들의 경제해법 훈수를 며칠간 감수해야 했다.
대통령 오바마의 첫 유럽순방은 사실 원성 높은 일방주의 부시외교시대를 마감하고 타협의 다자주의 외교의 새 시대를 선언하는 축제의 분위기였어야 했다. 그렇게 오바마는 지성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유럽과 코드가 딱 맞는, 유럽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유럽은 오바마랜드, 유럽인은 오바매니아로 풍자될 만큼 유럽에서의 오바마 인기는 미국내를 능가한다. 대선 유세차 들렀던 독일에서 그의 연설을 들으러 20만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지난여름에 비해 그다지 퇴색하지도 않았다. 런던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이고 있는 시위에서도 부시 때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오바마에 대한 공격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경제위기 와중의 국제정치 기류는 터프하다. 세계정치무대에 막 등장한 인기스타 오바마에 대한 각국 정부, 각국 정상들의 시각은 다르다. ‘오바마의 외로운 투쟁’이라는 헤드라인이 나올 정도로 냉랭하다. 우선은 각국이 처한 입장이 제각각이어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오바마 지지도는 80%를 넘지만 사르코지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오바마의 경기부양위한 추가재정지출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한(실직을 해도 의료보험을 상실하지 않는다) 유럽에선 경기부양보다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를 위한 금융규제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다양한 과제를 안고 이번 순방을 시작했지만 가장 중요한 두가지는 경제위기 해결위한 국제공조와 그의 새 아프간 파병증원 전략을 위한 유럽동맹국들의 지원확보다. 경기부양과 금융구제, 두 갈래 경제대책 중 미국이 적극 제안한 경기부양을 정면 거부한 유럽 정부들은 아프간 추가지원에도 시큰둥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돈도, 군대도 더 이상 내놓을 여력이 없다”는 통보다. 미국에 대한 반감은 높아졌고 미국의 위상은 낮아졌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반응이다. 유럽만이 아니다. 개발도상국들까지 미국 앞에 더 이상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투지가 역력하다.
세계경제위기의 주원인을 제공한 미국에 대한 분노를 대변하는 각국의 불만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인 오바마는 “나는 미국의 대표로서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청하기 위해서 왔다”면서 국제사회의 리더라기보다는 ‘동료(peer)’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포용의 리더십을 강조한 것이다.
아직 절반도 못 끝낸 순방의 성공여부를 당장 진단하기는 이르다. 많은 질문들만 수면으로 계속 떠오르고 있다. 국제사회만이 아니라 미국의 유권자들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관점들이다 : 오바마는 세계를 리드할 수 있을까. 그의 세계적 인기는 세계적 영향력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다자주의 타협외교는 미국의 국익에 얼마나 득이 될 수 있을까. 지난 대선에서 경제회복 다음으로 유권자들의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해외에서의 미국의 이미지 개선’ 약속을 그는 과연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오바마가 외교 데뷔전에서 긍정적 답변을 들고 돌아올 수 있다면 그는 공화당에 사사건건 발목 잡히고 있는 국내문제 해결에도 큰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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