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워싱턴에선 주인공이 빠진 대규모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전통적으로 워싱턴 정가의 봄을 알리는 그리다이언 클럽의 연례만찬이었다. 워싱턴 정상급 언론인들의 모임인 Gridiron Club은 글자 그대로 석쇠 클럽이다. 누가 무엇을 굽는가. 재치있는 유머와 따끔한 풍자로 활활 피운 불 위에서 구워지는 것(roast)은 정치가들이고 석쇠를 들고 굽는 정도를 조절하는 것은 주로 기자들이다. 디너의 주요 코스는 그러니까 로스트비프 대신 로스트오바마나 로스트부시가 되는 셈이다. 매년 대통령을 ‘메인디시’로, 지난 한해 미국을 때론 웃기게, 때론 황당하게 했던 정치가들이 뜨거운 불 위에 올려진다.
거침없는 풍자와 따끔한 조크로 미국내외 현안을 짚어가는 패러디에 좌중이 무르익으면 석쇠를 쥐는 것은 꼭 기자들만이 아니다. 정치가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진다. 1년 중 364일은 서로 팽팽히 맞서며 힘겨루기를 계속하는 기자와 정치가들에게 이 ‘1일 휴전’은 웃는 얼굴로 벌이는 복수전을 통해 긴장을 푸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치가들의 결점과 실언을, 미디어의 편향과 오도를 서로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유쾌한 어조로 허세를 벗겨낸다. 그러나 로스트에도 불문율은 있다. 클럽의 모토이기도 한 ‘그을리되 태우지는 않는다(singe but never burn)’ - 실컷 놀리고 약 올리긴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상호 존경과 신뢰, 우정을 깔아놓자는 뜻이다.
124년 역사의 그리다이언 클럽 회원수는 65명, 워싱턴정가를 커버하는 기자와 칼럼니스트 등 현직 언론인에 한한다. 가장 오랜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명문’으로 65명 정원을 고집하니 가입은 하늘의 별따기다. 배타적 엘리트 그룹으로 비난도 받지만 가입대기 명단은 끝없이 길다. 매년 파티장 밖에서 여성차별 반대시위가 거듭된 끝에 첫 여성회원으로 UPI의 헬렌 토머스를 받아들인 것이 70년대 중반이었고 신문기자만의 모임에서 TV기자들에게 문을 열어 쟁쟁한 앵커들이 가입할 수 있었던 것도 90년대 들어서였다.
몇달전부터 갖가지 패러디를 준비, 리허설까지 가진 후 600명 각계 인사들을 초청해 베푸는 이날 만찬의 주빈은 대통령이다. 1885년 클럽 발족 당시의 제22대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을 제외하곤 43대 부시에 이르기까지 취임 첫해 이 행사를 외면한 대통령은 없었다. 대공황 때의 루즈벨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통령 닉슨과 부통령 애그뉴의 멋진 피아노 이중주, 포드대통령 부인 베티여사의 경쾌한 탭 댄싱, 카터부부의 신나는 지터버그(지르박)춤, 빌 클린턴의 섹시한 색소폰 연주가 박수를 받은 곳도 이 파티에서였다.
그런데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미디어의 편애를 받아왔던 버락 오바마 신임대통령이 행사 8일전에 불참을 통보해왔다. 백악관이 밝힌 공식 이유는 “가족과의 휴가”였다. 클럽 측의 공식 응답도 “이해한다”였다. 그러나 오바마가 ‘휴가’ 간 캠프 데이빗은 워싱턴에서 헬리콥터로 불과 20분 거리다.
회원들은 “오바마가 원하는 변화가 전통에 대한 외면이냐”정도로 감정대응을 삼갔지만 워싱턴 정가엔 진짜 이유에 대한 추측이 순식간에 와글와글 퍼졌다. “이 경제상황에서 1인당 300달러 랍스터 디너파티에서 흰 보우타이 턱시도 차림으로 그것도 워싱턴 인사이더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껄껄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고 “능력에 넘칠 만큼 너무 많은 과제를 한꺼번에 욕심낸다고 연일 질책을 퍼붓는 그들과 함께 웃고 싶지 않아서”라는 분석을 인용한 폴리티코는 ‘트집 많은’ 워싱턴 기자단을 건너뛰어 미 국민과의 직접 대화를 추진하는 게 오바마팀의 새 미디어 전략이라고 소개했다.
새 전략은 지난 한두주 확실하게 눈에 뜨였다. 대통령은 곳곳에서의 타운홀 미팅과 NBC 제이 레노의 토크쇼, CBS의 ‘60분’ 출연에 더해 ESPN에까지 모습을 나타내며 자신의 어젠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직접 호소했다. 24일 기자회견에서도 백악관의 전통을 깨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릿 등 주요신문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지 않았다.
21일 파티의 압권은 공화당인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오바마에 ‘배신당한’ 주류미디어를 향해 뼈아픈 펀치를 날렸다. “당신들은 그를 백악관에 보내기위해 목숨을 걸었었지요. 턱시도로 성장하고, 샴페인도 얼음에 채워놓고(기다리고 있는데)…이제야 깨달은 것이지요 , 그가 당신에게 그렇게 반하지 않았다(He’s just not that into you - 영화제목)는 것을”
좌중엔 폭소가 터졌지만 회원들의 자존심은 편치만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파티 보도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리다이언에서 나온 속보입니다 : 허니문은 끝났습니다 , 대통령 각하’
오바마에 대한 미디어의 비판 수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아직 때리기(bashing)까지는 아니지만 ‘괴롭히기(hazing)로 바뀌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진단한다. 오바마 팀의 작전 실패라는 학자들의 분석도 있지만 벌어진 ‘그들 사이’는 잘된 일임에 틀림없다. 권력과 언론의 유착은 아무리 인기 높은 대통령시대라 할지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