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뜬다. 손은 무의식중에 다른 손가락을 만지고 있다. 봄 햇살이 완연하건만 심장은 떨리고 있다. 침실의 공기는 팽팽하다. 아직 멀쩡히 손이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병원에서 제 몸이 언제 꼬부라질지 모른답니다. 음악 하는 사람에게 손은 생명 같은 것이라 제 몸을 확인하는 게 저도 모르게 버릇이 됐나 봐요.”
악성 류마티스의 한 종류인 불치병을 앓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신 씨(맥클린 거주)의 아침은 매일 그렇게 찾아온다.
자신의 절망 보듬어안고 장애아에 용기의 선율 선사~
어느덧 3년 전이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또 다른 병이 불쑥 튀어나왔다. 백혈구에 문제가 있어 생긴 희귀한 류마티스 병이었다. 의사는 그의 몸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통보했다.
감기 한번 안 걸렸던 그의 몸은 두 번의 수술에다 낯선 병과 만나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만신창이가 됐다.
“감기 한번 안 걸리던 몸이었어요. 아픈 사람을 이해 못하던 건강한 저였어요. 근데 왜 저에게 이런 병이 찾아왔는지 납득할 수 없었어요.”
그 충격에 수술로 가슴을 도려낸 슬픔조차 아득했던 지독한 그 해였다. 그를 지탱해온 음악에의 정열과 지적인 힘, 낙관의 태도는 도무지 힘을 쓸 수 없었다. 스스로를 옥죄고 자책하며 어둠 속에 웅크려 나날을 보냈다.
“그날 이후 약 기운으로 살아왔어요. 매주 독한 주사를 맞고 하루에 약을 12알이나 먹어요. 너무 힘들어요.”
다행히 투병에 따른 부작용은 없었다. 머리카락도 온전하고 얼굴은 멀쩡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역시 시간과 자신의 의지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병을 받아들였습니다. 난 아픈 사람이다, 이 정도 아픈 것도 감사하며 살자, 기도도 하면서 뭐 이런 생각을 하니 살게 되더라구요.”
폐허에 멈춰 있던 그의 시선은 차츰 빛을 향해 긍정의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일상을 회복했다. 육신은 여전히 고통에 놓여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나들이도 하고 웃음도 조금씩 찾았다.
바위는 모래가 됐을 때 비로소 반짝이기 시작한다는 말처럼 그의 음악세계도 변화를 겪었다. 그의 현(弦)을 사로잡았던 조급한 마음과 라이벌 의식은 점차 옅어졌다. 건강할 땐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음의 떨림까지 포착하고 음악을 대하는 시야는 한층 넓어졌다.
얼마 전에는 러시아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오는 20-24일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열리는 제2회 ‘Step Forward’ 국제 페스티벌 초청장이다.
러시아 문화교육성이 주최하는 이 축제는 세계의 장애 어린이들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매년 마련되는 종합 축제. 그는 장애인 아티스트로서 개막식에서의 바이올린 독주와 개막사를 부탁받았다. 아시아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인 영광의 초대다. 그는 러시아곡인 ‘로망스’와 신규복 작곡의 ‘얼굴’을 연주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제겐 각별하게 다가와요. 장애 어린이와 예술인들을 위해 오라지만 사실은 저를 위해 갑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라지만 오히려 제가 이번 공연 나들이를 통해 위로 받고 삶의 희망을 얻을 거란 예감이 듭니다.”
언제까지 음악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지 몰라도 이경신은 희망이란 단어를 놓지 않는다.
<이종국 기자>
■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신은
이경신은 공직자인 부친을 따라 4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12살까지 살았다. 14살에는 다시 주미대사관에 파견된 부친과 함께 유학차 도미했다. 친정아버지는 1979년 부마 민주화운동 당시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며 시위진압에 소극적이란 이유로 차지철에 의해 해임된 이수영 전 부산 시경국장.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마치고 카톨릭 대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 트리오 멤버로 활동하면서 뉴욕시 심포니(카네기 홀), 보스턴 필하모닉,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등과 협연하며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2002년에는 워싱턴 한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조직, 음악 감독으로서 동포사회의 음악발전에 기여했다. 개인 음악 앨범 ‘Warm Affection’을 냈다.
현재 남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함께 시아버지인 김웅수 전 카톨릭대 교수(전 6군단장)를 모시고 맥클린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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