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 ‘혈세’로 연봉 12만달러씩이나 받는 주의원들의 역량이 고작 이 정도일까? 결단력 있는 카리스마를 과시하며 초당정치를 장담했던 터미네이터는 이제 수명이 다한 것일까? 지난 며칠 캘리포니아 주의회의 예산안 파행 질주를 지켜보는 주민들의 심정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난 3개월 몇 번이나 밤샘 회의를 강행한 끝에 주지사와 양당 지도부가 지난 주말 합의한 예산안엔 서로 조금씩 양보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지출은 151억달러 삭감하고, 수입은 세금인상 144억달러에 대출 및 연방지원금 114억달러를 합해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았다. 지출삭감을 반대하는 민주당이나 세금인상을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뿐이 아니다. 주민 모두에게 불만스러운 내용이다. 가뜩이나 이 힘든 불경기에, 세금을 더 올리다니, 생활보조금과 자녀들 학비보조를 깎아 내리다니…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예산안과 저 예산안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게 아니라 이 합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주정부가 파산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1848년 북가주 언덕에서 금광이 발견된 이후 황금의 땅으로 전 세계의 선망을 받아오던 골든 스테이트가 요즘은 미국 50개주 최악의 재정난에 시달리는 골칫거리의 땅으로 전락했다. 10여년전만 해도 세계 하이텍의 붐타운으로 각광받던 캘리포니아가 지금은 파산의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실업률은 전국4위, 주택차압률은 전국2위, 크레딧은 가장 가난한 루이지애나 주정부보다 낮은 최하위다.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지적된다. 주정부 예산규모가 98년 560억달러에서 2009년 1,430억 달러로 폭등했다. 노조 등 이권단체에 휘둘린 정부의 흥청망청 지출이 한몫을 담당했다. 규제는 더해지고 세금은 인상되는 와중에서 기업들의 캘리포니아 이탈이 러시를 이루며 일자리도 함께 줄어들었다. 거기에 주택시장 붕괴로 시작된 경기침체가 덮친 것이다. 높은 세금에 과잉규제, 절제없는 과다지출로 병든 재정에 불어닥친 세계적 불경기…재정적자가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2010년이면 재정적자 420억달러, 작은 국가 하나쯤 파산시킬 액수다.
심층 원인 분석에 의한 장기적 대책도 물론 필요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당장의 위기다. 쓰러지기 전에 우선 세워놓아야 한다. 2만명 공무원 감원도 막아야 하고 택스환불도 우송해야 하며 DMV의 문도 제대로 열어야 하고 중단된 하이웨이 공사도 계속해야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비상사태의 응급조치 시행이 단 한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공화당 주 상원의원 한사람만 예산합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 예산안은 통과된다. 이 코미디 같은 예산심의 파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지난 몇 년간 캘리포니아주 예산안의 발목을 잡아온 것은 ‘예산안과 세금인상안 통과에는 상하양원 각각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명시한 주헌법의 규정이다. 1933년 대공황 시기에 ‘예산이 전년도보다 5%이상 증가되었을 때 적용된다’는 단서를 붙여 채택되었는데 1962년부터 그 단서를 떼어버리고 그 후 모든 예산안과 증세안 표결에 적용시켜왔다.
초기에 같은 규정을 갖고 있던 다른 주들은 그 불합리성을 깨닫고 수정법안을 통해 3분의 2 찬성이라는 수퍼머조리티 제약에서 오래전 벗어났다.
지금까지 이 규정을 갖고 있는 주는 거의 일당 체제와 비슷한 아칸소와 로드아일랜드뿐이다. 캘리포니아도 양당 대립이 그리 심하지 않고 경기도 좋았던 70여년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예산안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통과되었으니까.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은 매년 예산안 통과가 이 규정에 발목을 잡힌 채 진통을 겪고 있다.
하원80명 상원40명의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하원 54명 상원 27명이 찬성해야한다. 현재 다수당인 민주당 의석은 하원51석, 상원24석이다. 민주당이 다 찬성을 하더라도 상하양원에서 각각 공화당 표를 3표씩 확보해야 한다. 하원은 확보됐는데 상원에선 18일 오후 현재에도 아직 한 표가 부족하다. 포섭대상 3명 중 2명은 찬성을 악속했으나 멕시칸 이민농부의 아들로 중도파 공화당인 아벨 말도나도 상원의원이 찬성할듯 말듯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결국 예산안 통과여부가 그 한사람, 소수당 의원 손에 달리게 된 것이다.
시대에 맞지않는 3분의2 규정에 대한 폐지는 그동안 여러번 추진되었다. 2004년엔 주민발의안으로 투표에 회부되었다가 66% 반대로 부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그 후 몇 년 상식을 벗어난 예산안 파행에 실망하며 크게 바뀌었다. 지난 11월 여론조사에선 폐지 찬성이 53%, 반대가 41%로 나타났다. 주의회에도 수정안들이 올라와 있고 헌법회의를 소집해 바꿀 수도 있다. 물론 수정안도 헌법회의도 또 3분의2 찬성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수의 권한이 무시되는 소수의 횡포라는 이상한 현상이 빚어지는 예산안 해프닝은 제발 올해로 끝냈으면 한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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