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넘은 일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해 1월의 서울 날씨는 지독하게 추웠는데 캘리포니아는 봄날씨다. 계획은 한국에서 알게된 미국친구가 사는 세바스토폴에서 잠시 머물다가 유타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반갑게 해후한 친구 부부와 함께 운전해 가는 차창밖은 황량한 시골 풍경이고 비가 오지 않은 때가 되서인지 들은 누렇다. 내가 생각하고 그리던 고층 건물이 즐비한 그런 USA 가 아니였다.
좀 실망 하기도 했다. 내 친구가 사는집도 그렇고 하여 나름대로 적응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다. 여행에 지치고 다른곳으로 옮긴다는게 수월치 않아 그냥 이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우선 이곳에 있는 초급대학에 영어를 위시한 몇과목을 등록하니 등록금이 없다고 한다. 학생회비 몇불만 내면 된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리고 얼마의 생활 보조금도 후원 하겠다는 자상한 카운슬러의 이야기다. 어렵게 고학하며 등록금 마련하던 서울에 비하면 너무 놀랍다.당시 인구 7만명의 작은 지방도시에 한국학생이 5명이 있었다. 그리고 평안북도 선천출신인 미세스 에이비슨이 우리 한국학생 들을 돕고 있었다. 한국명이 사애라인 노교수는 미국 선교사의 따님으로 이 학교 간호학과 과장을 하고 있었다.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우리말을 하던 당시 연세가 60세를 바라보는 분이었다.
나의 미국생활 첫관문인 산타로사는 참아름다운 도시다. 농업이 중심이고 당시 막시작 한 소노마 카운티 포도주 산업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 하던 곳이다. 한국학생 중에서는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
새로 알게된 한국학생들과 주말에는 보데가 베이 등 우리에게 잘알려진“알프레드 힛치콕”감독이 제작한 영화 “새”의 촬영지도 구경하고 근처 바다에서 홍합을 채취하기도 했지만 요리하는 방법을 몰라 버리기도 했다. 주말이면 없는 돈을 염출하여 옥시덴탈에 있는 이태리식당에 가서 파스타로 포식하기도 했다. 모두 마음이 풍부하던 때였다. 근처의 세바스토폴은 그레벤스틴 사과의 명산지로 전원의 도시다. 어렵게 장만한 고물 폭스바겐“버그”를 타고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해 가족과 이민온 여학생과 사귀게 되고 얼마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감리교인인것을 안 사애라선생님이 주선 하여 산타로사 제일감리교에서 덜튼목사의 주례로 백년해로하기로 한지가 40년이 되어온다. 주위에 친구들과 학교 교수들이 참석한 조촐한 식이 였다.
내 아내는 그때 초급대학에 입학 했고 나는 한국학생으로 처음 소노마 스테이트 칼레지에 학사편입 하게 되었다. 전교 학생이 2,000명인 작은 주립대학(csu)이고 학생의 대다수가 인문계를공부하는 리버랄한 학교였다. 히피가 많다하여 히피 대학이라고도 했다. 그중에 경영학전공은 100여명이고 회계학을 공부하던 학생은 나까지 포함하여 5명이 였다. 그중 3명이 졸업후 CPA가 됬으니 60%가 전문자격증을 받은 셈이다.
나는 워낙 산업심리학공부를 하려고 미국에 왔는데 버클리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한국서부터 알던 친구의 권유로 회계학을 하게되었다. 참 어렵고 따분하게 느껴져 여러번 포기하려고 했다.
당시 학교에서 멀지않은 곳에 한달에 가구까지 포함한 월세 $120하는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돈도 부족하여 학교를 얼른 마치려고 일을 하면서도 풀타임으로 공부했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후 5,6년지나 다시 공부하려니 퍽 어려웠다. 그때 22살된 아내의 격려가 컸다.
해이해지려는 나에게 용기도 북돋아 주었다. 월남전의 막바지인 그때 흑인들이 주도가된 불랙 팬더운동과 더불어 사회주위 물결은 내가 다니고 있던 대학을 피해가지 않았다.백인 학생 보수 단체가 대학의 안정을 되찾게 하며 학생들의 애국심에 호소도 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들은 조지 워싱톤, 에브라함 링컨과 존 케네디의 연설을 인용 하며 학생들의 자중을 호소 했다. 그들 덕분에 큰 불상사 없이 급진주위 물결은 우리 대학을 지나 갔다.
결혼식도 소노마 카운티에서 했고 병적 등록했으니 산타로사는 미국와서 둥지를 튼 곳이다. 대학을 졸업한 1971년 봄에 그곳에서 직업을 구하기가 참 어려울때 였다. 이즈음 못지 않게 실업 율이 높을때여서 그곳을 떠나 베이에리아에 정착을 하기에 이르 렀다. 산타로사 하면 마음이 늘 훈훈해 진다. 때로 101 프리웨이로 북쪽을 향해 달려 내가 졸업한 소노마 스테이트 유니버시티(이제는 대학교다) 교정에 들려 40여년전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당시에 이 작은 대학이 나의 미국생활 정착과 주류 사회 참여에 얼마나 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는가 생각도 한다. 내가 이 학교에 진 빚이 많다고 늘 생각 한다. 어려 울 때면 내가 살던 세바스토폴도 돌아보고 마음의 안정도 찾는다.
오래전에 가수 조영남이 “내 고향은 충청도예유” 라는 노래를 했다. 함경도 피난민인 그가 피난살이 한 그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함경도 출신인 나 역시도 그를 빌어 “산타로사는 내 고향이요” 하고 중얼 거린다. 틀림없이 산타로사는 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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