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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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one with faith,
no explanation is necessary.
To one without faith,
no explanation is possible.
믿음이 있는 사람에겐
설명이 불필요하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겐
설명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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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느 무식쟁이 짚신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불도를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소리를 흘려 듣고 발심한 후 늘 스스로 성불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부처가 무엇인지를 몰라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동네 가까운 절에 큰스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여쭙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하고 큰스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무식한 촌로는 즉심시불을 짚신 세 벌로 잘못 알아듣습니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짚신 세 벌이 부처라고 하시는가?
촌로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자신이 무식하여 모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는 감히 다시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짚신 세 벌은 곧 화산처럼 거대한 의심의 불덩이가 되어 그의 전 존재를 옭아매기 시작합니다.
“왜 짚신 세 벌이 부처란 말인가?”
이 같은 의심은 어느새 화두 아닌 화두로 변해 짚신장수 촌로의 일상을 온통 지배하게 됩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나 감고 있을 때나, 먹을 때나 배설할 때나, 짚신을 만들 때나 팔 때나 언제나 늘 초롱초롱한 물음으로 남아 있는 짚신 세 벌.
이렇게 달이 차고 해가 저물고 또 몇 해가 흐릅니다. 어느 날, 이 무식쟁이 노인의 마음에 ‘드디어’ 문 아닌 문(무문)이 열리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진리가 확연하게 그를 압도합니다. 그리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환희심으로 활짝 만개한 짚신장수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 나옵니다. 과연 짚신 세 벌이 부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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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one with faith,
no explanation is necessary.
To one without faith,
no explanation i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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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시불(卽心是佛)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마음이 곧 우주의 거울이며, 마음을 깨치는 그 존재가 바로 곧 부처에 다름 아니란 말씀입니다. 깨치는 자와 깨침을 자각하는 자가 둘이 아니며, 늘 있어온 깨침을 이제 비로소 깨침이란 느낌으로 다시 확인하는 그 존재도 바로 늘 함께 있어온 불성임을 싱겁게 확인하는 게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참 뜻입니다.
인간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마음 전체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부처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부처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 (是心作佛 卽心是佛)라는 무량수경(無量壽經)의 말씀이 ‘즉심시불’이란 말의 출처라 합니다.
대매산 법상(法常)이 마조를 참례하며 묻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스님께서 답합니다. 마음이 곧 부처니라 [卽心是佛].
무엇이 부처인가(如何是佛)라는 물음은 진리가 무엇인가? 또는 도(道)란 무엇인가? 또는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조의 제자인 대매 법상(法常)은 마조선사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그 한 마디에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대매는 스승의 이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대매산(大梅山)에 은거하여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조선사는 법상이 칩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합니다.
스님께선 마조스님한테 뭘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스님께선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 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당신의 스승이신 마조스님의 법문이 요즘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즘은 비심비불(非心非佛)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 맘대로 비심비불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을 드렸더니 마조선사께서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과연 매실(梅子)이 잘 익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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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one with faith,
no explanation is necessary.
To one without faith,
no explanation is possible.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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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 ‘faith’는 실로 고상한 말입니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절대적 신뢰, 마음이 아닌 심정으로서의 믿음, 신념, 확신, 신앙, 신조, 절대적 믿음 등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duty of fulfilling one’s trust’ [스스로의 믿음을 실현할 의무]라는 뜻을 내포한 라틴어 ‘fidere’ 즉 믿는다는 뜻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믿음은 축복입니다. Faith is a blessing. 하얀 초심으로 그저 투명하게 ‘바로’ 보는 사람은 진지한 믿음을 견지합니다. 미신이나 맹신으로 믿는 건 아닙니다. 뚜렷한 직관에 뿌리를 내리고, 차마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러나 분명한 확신을 갖고 믿습니다. 왜 어떻게 믿느냐는 건 뱀 다리를 논하는 것과 같이 ‘불필요’해집니다. 그저 믿기에 믿을 뿐입니다. 왜 믿냐고요? 그건 굳이 말로 설명할 방법도 필요도 없답니다.
[신약성경 마태오복음서 14장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O,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즉심시불이든 짚신 세 벌이든 ‘오직 모를 뿐!’이란 자세로 늘 참구하다 보면 화두는 뚫리게 됩니다. 결국 ‘그 분’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저 믿고 한 길로 매진 할 수 있음은 진정한 축복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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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for the Soul 지난 글들은 우리말 야후 블로그 http://kr.blog.yahoo.com/jh3choi [영어서원 백운재], EFTS 폴더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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