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문학과목 AP클래스의 에세이 쓰기는 늘 있는 일이었다. 최근 포모나의 빌리지아카데미 학생들이 받은 숙제는 제목도 평범한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담당교사 마이클 슈타인먼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거기엔 경제위기의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며 고통받는 어린 제자들의 신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의사, 과학자, 기업가 등 전문직에 진출할 밝은 미래를 확신하고 있던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의 실직, 주택차압, 파산 등 경제악화로 가족의 생계를 위협당하면서 대학진학은커녕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불안에 떨며 절망하고 있었다.
슈타인먼 교사의 격려로 이들의 에세이는 오바마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동영상으로 제작되었다. 마음속에 눌려있던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10여명 학생들의 스토리는 유튜브에 올려져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메이게 하는 증언이 되고있다. 백인 남학생 크리스는 “집세를 4개월째 못냈어요. 난 괜찮지만 내 동생들이 홈리스가 될까봐…” 말을 못 잇고 눈물을 씻었다. 라틴계 칼로스는 “부모님은 아무래도 멕시코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지만 난 정말 가기 싫어요” 감정에 북받쳐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민가족의 꿈이었던 ‘우리 집’을 1년전 차압당했다는 에블린, 집에서 돈 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빅토리아, 호세, 소냐, 그리고 한인 여학생 주희까지, 아이들은 제각기 자신과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을 압박하는 경제악화의 체험을 아무런 각색과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 담은 이 동영상에서 묻고 있다 :
(우리들의 이 절박한 호소를, 이 생생한 두려움을) ‘누구 들어줄 사람 없어요?’(Is Anybody Listening?)
이들의 호소를 들어주어야 할 버락 오바마가 20일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인종분리에서 벗어난지 불과 40여년만에 첫 흑인대통령을 탄생시킨 자부심과 감격으로 미전국은 온통 축제의 물결이다. 사방에 역사적 순간이 넘쳐난다. 그러나 오바마는 한 개인의 꿈의 성취를 넘어 한 국가의 약속이 실현된 이 ‘위대한 역사’의 바다에도 그리 오래 잠겨 즐길 입장이 못된다. 그만큼 시급하고 위중하다. 미국이, 미국의 대통령이 처한 입장이 그렇다.
그의 취임 연설도 이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열광적 환호를 몰고다니던 캠페인의 웅변은 찾기 힘들었다. 연설은 진지하고 명료했다. 감동적이진 않았으나 솔직했다. 역사의 의미도 짧고 강한 한마디 언급에 그쳤다. “60년전 식당에서 서브를 거부당했을 아버지의 아들이 지금 가장 신성한 선서를 하기위해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자유와 신념의 의미입니다”
200만 인파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는 엄숙하리만큼 침착했다. 미국이 현재 경험하는 이율배반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 했다. 미국은 지금 환희와 불안이 교차되는 혼란의 와중에 서 있다. 희망과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절망의 근거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념과 계층을 초월한 폭넓은 지지와 못지않게 무거운 짐을 동시에 지고 출발하는 오바마의 앞길은 순탄치 않다.
취임 다음날부터 소매를 걷어붙였지만 쉬운 해법은 하나도 없는 게 그가 직면한 현실이다. 최우선 과제인 경제회복부터 그렇다. 2월 중순으로 기대하는 경기부양법안 통과는 그중 쉬운 부분이지만 민주당 의회와의 밀월을 감안한다 해도 만만치 않다. 통과 후 전망 역시 불투명하다.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지, 8,000억달러로 충분한지, 경제전문가들의 분석도 엇갈리고 있다.
다른 모든 과제도 산 넘어 산이다. 민권의 침해 없이 미국의 안보를 지키려는 47세 젊은 대통령에게 세계는 한 마음으로 협조를 보내줄 수 있을까. 큰 정부·작은 정부의 논쟁을 일축하고 보통사람들의 안정된 일상을 돕는 정부의 투명한 기능을 강조했지만 과연 재선을 앞둔 대통령은 타성에 젖은 노조의 파워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변덕스런 민심은 장기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 희생을 감수하자는 그의 설득에 화답해 줄 것인가…
다행인 것은 그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넉넉히 소유한 정치적 자산이다. 부시나 클린턴보다 20% 포인트 가량 높은 83%의 지지도로 출발한다. 상대적으로 기대치는 낮다. 59%가 경제회복이 2년 이상 걸릴 것으로 각오하고 있다. 기적에 가까운 조속해결을 재촉하지 않고 참아주는 여론의 지지가 오래갈 수 있다는 뜻이다.
감조차 잡기 힘든 천문학적 액수의 경기부양책이나 그에 따라 악화될 적자의 규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부분의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1930년대 미국인들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을 위해 신설한 수많은 제도와 기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들은 대통령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걸 믿고 무조건의 지지를 보냈다. 루즈벨트는 어떻게 이같은 신뢰를 얻었을까에 대해 부인 엘러노어 여사는 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힘은 순수한 동기에서 나왔다.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미국이 직면한 모든 문제가 부시의 탓에서 오바마의 탓으로 옮겨지는 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바마가 루즈벨트의 이런 신념을 이어받는다면, 그래서 “듣어줄 사람 없어요?”라고 호소하는 고교생들의 불안과 고통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4년후 이번 보다 훨씬 여유있게, 훨씬 감동적인 취임연설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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