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리뷰- 살로넨 ‘LA필 16년’마감 연주
지난 16년간 LA 필하모닉을 반짝반짝 닦아서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에사 페카 살로넨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지난 18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찾았다.
‘세계 정상’이라는 표현이 좀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도록 LA필은 요즘 정말 잘하고 있다(클래식 잡지 그라모폰이 2008년 12월호에서 매긴 세계 교향악단 순위에서 LA필은 8위에 올랐다). 그리고 앞으로 더 잘 할 것으로 모두들 기대하는 것이, 다음 시즌에는 클래식의 수퍼스타 구스타보 두다멜이 상임지휘자로 부임할 것이기 때문이다(LA필은 오늘 22일 디즈니 홀에서 두다멜과 데보라 보다 LA 필하모닉 대표이사와 함께 2009/10 시즌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갖는다).
이날의 연주 프로그램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Sinfonietta by Janacek)와 루이스 안드레에센의 ‘헤이그 해킹’(The Hague Hacking by Louis Andriessen, 카티야 라베크·마리엘 라베크 자매 협연으로 세계 초연),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by Stravinsky)이었다. 모두 현대음악으로 이해와 감상이 쉽지 않은 곡들이었지만 살로넨이 지휘하는 ‘봄의 제전’을 꼭 한번은 듣고 싶어 이날의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은 1913년 3월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니진스키 안무로 초연됐을 때 관객들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난동을 부린 일이 아주 유명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그때까지 부드럽고 안정된 음악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음산한 스토리(젊은 남녀들이 광란의 춤을 추다가 한 처녀를 봄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고대의식을 표현)와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음악, 원시적이고 도발적인 안무의 발레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격렬한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 온갖 난해한 음악이 연주되는 요즘에 들으면 점잖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나 보다.
러시아적인 과격함과 직선적이고 명쾌한 리듬감이 특징인 ‘봄의 제전’은 여러 사람이 연주하고 녹음했지만 살로넨의 작품이 최고로 평가된다. 이 곡은 또한 1996년 살로넨과 LA필이 음향시설이 너무 좋은 파리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한 후 이사들과 기부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LA에도 최고의 공연장, 즉 월트 디즈니 홀을 만들기로 결정하게 된 곡이어서 살로넨에게는 이모저모로 의미가 남다른 곡이다.
북유럽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여서일까. 살로넨은 강렬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스타일로 곡을 풀어갔다. 난해한 음표들을 하나씩 살려내는 연주는 무한한 광기와 생명력이 느껴졌다. 한 평 남짓한 포디움을 좌우앞뒤 넘나들며 나비처럼 날고, 무용수처럼 춤추고, 투사처럼 싸워댄 살로넨의 지휘는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웠다.
폭풍과도 같은, 그러나 절제된 파워로 봄의 제전을 마쳤을 때 거의 만석으로 가득 찬 청중들은 그에게 끝없는 갈채와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냈다. 관객들은 이미 그와의 이별을 시작한 것 같았다. 살로넨도 감격에 찬 제스처로 팬들의 사랑에 정성껏 보답하는 인사를 여러 번 보냈다. 이번 시즌 살로넨이 지휘하는 연주회는 8회가 남았지만, 나 역시 다시 찾게 될 것 같지 않아 이날 그에게 감사와 찬사의 박수를 보내며 작별을 고했다.
26세의 앳된 얼굴로 LA필을 객원지휘하면서 이 도시와 첫 인연을 맺었고, 1992년 34세 때 LA필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그가 이제 50세의 노장이 되어 LA를 떠난다. 편안한 고전음악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하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세계 초연한 에사 페카 살로넨. “너무 튀고, 너무 차갑고, 너무 유럽적”이라며 처음에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조차 그가 확립해 놓은 LA필의 새로운 정체성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
4월16, 17, 18, 19일에 살로넨의 마지막 연주가 있다. 프로그램은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렉스’와 ‘시편 교향곡’. 그의 우아한 지휘와 강렬한 음악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음악팬들이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www.laphil.com
<정숙희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