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조지 W. 부시는 운이 없는 대통령이다. 경제가 괜찮을 땐 이라크전쟁 때문에 좋은 평가를 못 받았고 이라크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부터는 경기침체 때문에 또다시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도 8년 전엔 “Together, We Can(함께라면 우린 할 수 있습니다)”이라고 초당적 합의를 호소하며 워싱턴의 뉴페이스로 전국의 지지와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었다. 어느 교수님 못지않게 박학다식한 달변의 빌 클린턴이 전 세계의 조롱 속에 플레이보이 맨션으로 전락시킨 백악관의 품위와 명예를 회복시킨 것은 비지성적인 눌변의 부시였고 9.11테러의 충격에 아연한 미 국민의 단결을 선도하며 90%의 지지율을 누린 것도 부시였다.
닷새 후 퇴임하는 지금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가 물려주는 백악관은 쓰레기 하치장으로 비유될 만큼 혼란스런 난제로 가득 차있다. 끝내지 못한 두 개의 전쟁, 아직도 파키스탄 어딘가에 숨어있는 오사마 빈라덴, 훼손당한 미국의 이미지,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무능하고 무관심한 행정부, 사상 처음으로 1조달러를 넘어가는 적자, 그리고 대공황이후 최대의 경제위기…그의 집권 8년을 정리하는 미디어의 분석이 비판 일색인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혹독한 미디어에 비해 여론의 반응은 비교적 관대하다. 한마디로 ‘악몽같은 재난’이었다는 부정적 시각이 다수이지만 30% 가까이는 여전히 ‘안전한 일상’을 감사하고 있으며 떠나는 지도자에 대한 연민이랄까, 예의랄까, 예측불허 시대에 던져진 그의 불운에 대한 동정론도 전보다는 늘어나고 있다.
사실 업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9.11직후 미국인의 80%가 확신했던 제2의 국내테러는 발생하지 않았고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의 80%는 부시의 기금확대로 생명을 구했으며 아직 미흡하지만 연방교육부 창설 이래 최대 성과의 하나로 꼽히는 낙제학생방지법도 시행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시는 무엇보다 친이민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성사는 못시켰지만 불체자 사면을 포함한 포괄적 이민개혁안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보수우파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는 정치적 손해를 감수했으나 퇴임하며 공화당에 던진 충고도 “반이민 이미지를 벗고 소수계를 포용하라”였다.
부시가 소탈한 친화력과 유머를 갖춘 ‘좋은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나흘 전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삼 의문을 갖게 한다 : 그는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국가를 곤경으로 빠트린 대표적 사태에 대해 줄곧 ‘실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4,200여명 미군과 수만명 이라크인의 생명, 7,000억달러의 세금을 바친 이라크전쟁의 ‘정당화 근거’였던 대량살상무기를 결국 발견 못한 것은 ‘중대한 실망’이라고 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도덕적 기준을 폭락시킨 죄수 고문을 ‘엄청난 실망’이라고 표현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시행정부의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리게 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늑장대응에 대해선 오히려 자신이 불공평한 비판의 희생자인 듯 강변했다. 중대 사안 중 어느 하나도 ‘실책’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반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사면초가의 부시가 기대하는 역사의 훗날 평가에도 일리는 있다. 부시 유산의 중심은 이라크 전쟁이고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작이나 과정이 아닌 결과에 의해 내려진다. 장기적 영향이 밝혀진 수십년 후가 될 것이다. 그때 이라크가 안정된 민주국가로 번영을 누린다면 부시는 자신이 원한대로 임기중 바닥 인기에서 후에 높은 평가를 받은 해리 트루먼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고 이라크의 불안정이 계속된다면 잘해야 베트남 패전의 책임을 면치 못한 린든 존슨에 비유될 것이다. 이미 시작된 역사학자들의 평가논쟁은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이므로 지금은 어느 누구도 결론을 장담하기 힘들다.
그보다 당장 부시의 유산은 후임자가 보고 배우는 교훈으로서의 가치가 클 것이다. 부시의 대통령 임기를 지배한 것은 9.11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경제위기 등 예측 못했던 재난이었지만 그 대응방향을 지배한 것은 그 자신의 성격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무능하다거나 정직하지 못해서 중대 실책을 범했기보다는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된 오만 때문이었다는 분석이다.
오바마가 부시에게서 얻을 가장 큰 교훈은 ‘대통령의 권한은 협박이나 강압의 하드 파워가 아닌, 회유와 설득의 소프트 파워를 택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프린스턴대학의 줄리언 젤리저교수는 말한다. 의회를 대할 때, 여론을 조성할 때, 다른 나라의 지도자를 대할 때 다 마찬가지다.
숭고한 이상을 가졌던 링컨은 수시로 자신의 소신을 굽혔고,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루즈벨트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던가는 측근들도 놀랄 정도였다고 콜럼비아 대학의 앨런 브린스키 교수도 증언한다. 대통령에게 필수적인 것은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과신하는 독선적 이상주의보다 대의 실현을 위해 타협과 양보를 거듭하는 실용주의라는 뜻이다.
오늘 저녁 부시는 대국민 고별연설을 할 예정이다. “난 정치를 위해 영혼을 팔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그의 소신이 대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채 또한번 강조될지 모른다. 열광의 갈채 속에 입성했다가 마지막 박수도 받지 못하고 떠나는 부시가 남겨놓을 교훈은 열광의 갈채 속에 새로 입성하는 오바마에게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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