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제목은 ‘옛날의 그 집’이었다. 지난 5월 타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남긴 유고작 중 한 편인 이 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그랬지 그랬었지/대문 밖에서는/늘/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누구에게나 ‘옛날의 그 집’이 있다. 6.25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군사정권 시절 사위 김지하 시인의 사형선고로 늘 고달팠던 작가처럼 모진 세월을 건너와 옛날의 그 집을 추억하는 사람들, 어려운 요즘 안팎으로 짐승들이 으르렁대는 그 집에 아직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 이런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마지막의 한 줄 ‘참 홀가분하다’였을 것이다.
그것은 강원도에서 농사로 말년을 보내며 그가 번잡한 세속을 훌훌 털어버리고 얻은 평화에 대한 부러움,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은 또 다른 시 ‘일 잘하는 사내’를 통해 그것이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지난여름 타임에 실린 ‘100개 도전(100 Thing Challenge)’이란 제목의 유쾌한 기사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자신의 소유물을 100개로 줄여 살아 보겠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샌디에고에 사는 38세 웹디자이너 데이브 브루노는 어느 날 문득 주변에 가득 찬 물건들이 자신을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 가를 깨달았다. 더 많은 물건이 있어야만 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100개의 물건만으로 1년을 사는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금년 11월12일 자신의 소유물을 100개로 줄이는데 성공한 그는 내년 11월12일까지 100개만으로 살아가는 도전에 돌입했다.
옷과 신발을 비롯한 수많은 소유물을 버리고, 팔고, 기부했지만 100개로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소유물이란 한 때의 자기를 표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용하던 아이팟도 팔고 피트 로즈가 사인해준 아끼던 야구셔츠도 처분했지만 책은 도저히 없애기 힘들어 예외조항을 만들기도 했다. 이 시대 우리들의 절대 종교가 되어버린 과잉소비에 대한 이 용감한 도전의 진전 상황은 그의 블로그 guynameddave. com을 통해 계속 지켜볼 수 있다.
호응은 브루노 자신이 놀랄 정도로 높았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연락이 줄을 잇고 700명 페이스북 프렌즈의 응원부대도 생겨났다. ‘모든 사람이 100개 도전을 실행한다면 우리 경제는 무너질 것’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한 기자도 물었다. “정부가 제발 물건을 사라고 호소하며 돈(경기부양 체크)까지 보내준 요즘에 너무 비미국적인 것 아닙니까?” 브루노가 대답했다. “우리가 돈을 정말 원하는 곳에 바르게 사용한다면 결국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 겁니다”
브루노의 도전이 계속 화제를 모으는 것은 주변에 쌓인 잡동사니에 짓눌린 사람들이, 잡동사니를 말끔히 정리해 버리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의 주변은 쓰지 않는 것, 필요하지 않은 것, 원하지 않는 것들이 쓰는 것, 필요한 것, 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해 늘 빽빽하고 혼잡스럽다.
물건만이 아니다. 더 처치곤란은 감정의 잡동사니다. 관계에 대한 집착,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도 그때그때 버려가며 정리하지 않으면 곧 우리의 생활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래서 생겨난 직업이 프로페셔널 오가나이저, 이 정리전문가들이 일러주는 성공적인 정리의 기본비결은 두 마디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 삶의 비전을 정의하라, 그리고 그 삶의 공간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골라내라.
몇달전 시카고대학 사회조사팀이 미국인의 고정관념과 달리 ‘청년보다 노인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었다. 발표내용은 아니지만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나이가 들면서 버리는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이 들어가며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사는데 필요한 것은 참으로 얼마 안된다’는 사실이다. 물건은 물론이고 감정도 마찬가지다. 삶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부당성에 집착하고 좌절하는 대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겸손을 배우고,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던 허황된 기대도 담담히 손에서 놓을 수 있게 된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삶의 방향이 확실해지면 살아갈 날들을 위한 선택에서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쓸데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가려내 실행하는 결단이 생기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파도 높고 바람 세찼던 한해가 저물어간다. 더 큰 풍랑을 각오하라는 사방의 경고가 우리를 두렵게 해도 마음을 다잡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거칠고 긴 항해에 대비, 어지러웠던 삶의 배를 정리해 가볍고 단단하게 행장을 꾸리면 된다. 농사를 짓거나 100개로 살기를 실행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홀가분한 삶, 그것은 온갖 ‘잡동사니’에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 일상이다.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할 12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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