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연방의회와 달리 12월 첫 월요일에 새 회기를 시작한다. 첫 날엔 의원 선서를 비롯한 몇 가지 절차만 거치고 할러데이 시즌동안 푹 쉰 후 1월 첫 월요일부터 정식업무에 들어가는 것이 전례였다. 그러나 금년 새 회기를 맞은 120명의 의원님들은 아직 ‘연말 휴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새크라멘토 주 의사당에 붙들려있다. 12월1일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재정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재정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주지사는 균형예산 통과를 위한 주의회 특별회기를 소집하는 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
슈워제네거는 ‘대재앙’을 경고하지만 솔직히 캘리포니아의 ‘재정 위기’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 자주 들어와 식상할 정도다. ‘위기’에 대한 긴장감 보다는 피로감이 앞서는 것이 대부분 주민들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심각하다고 아우성이다. 도대체 얼마나 나쁜 것일까. 보통 주민인 우리는 어느 정도 걱정해야 하는가. 주 살림의 엄청난 적자가 내 가계부엔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가.
지금 손 놓고 있으면 앞으로 2년내 수입 860억달러인 주정부의 적자는 절반에 달하는 418억달러에 이르게 된다. 회계장부가 부실경영의 대명사인 빅3 자동차 회사의 것보다도 엉망인 셈이다. 내년 2월이면 현금보유고가 바닥나 전기세 등 주 행정 경비결제를 차용증으로 해야 할 판이다. 연방정부라면 급한대로 돈을 찍어내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주 정부는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들어온 만큼만 써야 한다. ‘수입 한도 내 지출’은 2003년 재정악화 속에서 소환당한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를 밀어내고 당선된 슈워제네거가 캠페인 때부터 외쳐온 중심 공약이었다.
공약 실현을 위해 슈워제네거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초기엔 강경보수로 지출삭감을 시도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공화당의 배신 비난을 무릅쓰고 의회 다수파인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합의를 호소하기도 했다. 팽팽히 대립하는 양당 의원들을 때론 위협하고, 때론 회유하며 양보를 설득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적자는 날로 늘어만 났다.
미 50개 주정부 중 최악으로 판정받은 캘리포니아 재정난의 원인은 다각도로 지적되었다. 세법규정이 낙후되었고, 예산지출 관리감독이 소홀하며, 주민발의안을 통해 수십억 달러 기금의 용도를 묶어놓는가 하면 비상시 예비기금이 크게 부족하다…원인이 나왔으니 해결책도 보인다. 세제를 개선하고 지출을 조절하고 남발되는 주민발의안의 폐단을 줄이고 예비비를 늘이는 것이다. 세금을 인상하고 지출을 삭감하면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선 통하지 않는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하나의 시작이다. 민주·공화 양당이 기 싸움 벌이듯 마주 버티며 양보를 안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다수당이긴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주 헌법상 세금인상 및 예산관련 법안은 과반수가 아닌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화당과의 합의 없이는 통과가 힘들다.
공화당은 세금인상엔 결사반대다. 민주당은 모든 지출삭감에 난색을 표한다. 양쪽은 같은 이유를 댄다 - “요즘처럼 가뜩이나 힘든 시기에 경제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양당의 대립에 속을 끓이며 주지사는 다그친다. “피 흘리며 쓰러져있는 부상자를 놓고 어떤 앰뷸런스에 실어 어떤 병원으로 데려갈까를 싸우고 있느냐? 출혈부터 막아야지”
공화당의 주장처럼 세금인상 없이 지출만 삭감하면 어린이 건강보험인 헬시패밀리, 메디칼, 저소득층 대학학비보조, 장애인 가사보조 서비스 등 복지예산이 대폭 깎이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받는 타격이 클 것이다. 또 기금부족으로 공공사업이 중단되면 실업자 속출 등 경기 악화를 더욱 부추길 것이다.
민주당의 희망대로 세금인상을 단행하면 현행 7.25%로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판매세는 일부지역의 경우 10%가 넘게 된다. 자동차 정비에서 골프 그린피, 스포츠경기 티켓에 이르기까지 온갖 데에 다 세금이 붙게 된다. 슈워제네거의 트레이드마크는 자동차 등록세 인하였다. 데이비스가 3배나 올려놓은 등록세를 그는 공약대로 당선 후 환불해주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이제 슈워제네거가 원하는 적자해소방안에는 자동차 등록세 3배 인상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미 17일 오후엔 자금난에 봉착한 도로보수를 비롯한 수천개 공공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기금동결이 결정되어 그 여파가 우려된다. 주하원에서의 판매세 인상안은 공화당의 저지로 부결되었다. 특별회기는 의원들을 의사당에 가두어 놓고 있지만 교착상태는 여전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1시간에 170만 달러씩, 하루에 4,000만 달러씩…캘리포니아가 파산할 것이라는 예상마저 나돌고 있다.
묘수가 따로 없다. 지출삭감과 세금인상, 두 방안을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한 30대 한인가장은 두 자녀가 헬시패밀리 보험만 계속 받게 된다면, 50대 주부는 자동차 등록세가 3배까지나 뛰어오르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감수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런 시각이 주의원들에겐 불가능한 일일까.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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