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ho perceives Me everywhere
and beholds everything in Me
never loses sight of Me,
nor do I ever lose sight of him.
모든 곳에서 나를 인식하고
내 안에서 모든 걸 보는 이는
결코 내 모습을 여의지 않나니,
나 또한 그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느니라.
인도의 성전[聖典] 바가바드기타 6장 29절 말씀입니다.
편재(遍在)란 어디에나 있음을 뜻합니다. 위 아래 동서남북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함을 편재라 합니다. 없는 곳이 없다는 이중부정이 꼭 들어맞는
표현이 바로 편재입니다. 영어론 ‘옴니프레~슨스’라 하지요. ‘omni’는 모두란 뜻이고 ‘presence’는 현존한다는 뜻이니, 합쳐져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한다는 멋진 단어가 됩니다. 비슷한 말론 ‘유비~쿼티’ [ubiquity]란 말이 있는데, 역시 ‘모든 곳’ 즉 ‘everywhere’란 뜻의 라틴어 ‘ubique’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신의 속성을 말할 때 흔히, ‘omnipresence, omnipotence, and omniscience’라 하지요. ‘옴니프레~슨스, 옴니~포턴스, 앤 옴니~시언스’ 이렇게 모두 ‘omni’란 접두사로 시작하는 삼총사는 곧 편재, 전능[全能], 그리고 전지[全知]하다는 뜻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우주 곳곳에 두루 존재하는 주님의 속성을 그렇게‘omnipresence, omnipotence, and omniscience’라 칭하는 거죠.
불가능이 없고 모든 걸 두루 아시며 시/공간 모든 구석을 두루 메우고 있는 신의 속성을 깨우쳐 안다면 곧 나 자신도 ‘제대로’ 알게 된다 합니다. 신의 편재를 감지하는 나와 신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She is in me, and I am in Her. 그럼, 편재하는 신의 존재가 바로 나의 존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나의 편재로 신의 편재가 가능한 셈이죠. 그래,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는“내 안에서 모든 걸 보는 이, 나 또한 그를 결코 여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He who perceives Me everywhere
and beholds everything in Me
never loses sight of Me,
nor do I ever lose sight of him.
모든 곳에서 나를 인식하고
내 안에서 모든 걸 보는 이는
결코 내 모습을 여의지 않나니,
나 또한 그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느니라.
꽃 한 송이 모래 알갱이 하나 속에서 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푸른 하늘 흰구름 속에서도
신의 모습을 봅니다. 땅을 기는 지렁이 한 마리, 꽃 속을 가르는 꿀벌
한 마리, 나무둥치를 기어 오르는 다람쥐 한 마리, 푸드득 숲 위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의 움직임 속에서 곧 신의 자태를 느낍니다.
Rose is a rose is a rose! 장미는 한 송이 장미요 한 송이 장미다.
그렇게 ‘제대로’ 보이는 장미 한 송이가 바로 신의 얼굴임을 진하게
느낄 때, 신의 얼굴 속에 투영되는 내 얼굴의 본 모습도 감지하게
됩니다. 불현듯 발에 채인 돌부리에서조차 신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면,
신의 편재는 곧 내 존재의 발현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 세상 종교의 겉모습은 서로 조금씩 달라 보이지만, 모든 종교의
궁극적 체험은 결국 신을 또는 나의 본성을 직접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The consummate religious experience is direct perception of God.”
인도의 성자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Yogananda]의 말씀입니다.
‘direct perception’은 현상을 있는 대로 직시하는 걸 말합니다.
알고 판단하고 느끼며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걸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기분 나쁠 때 보는 황혼의 거룩함과 기분 좋을 때 보는 황혼의 거룩함이 똑 같을 수 있다면 곧 정견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연애시절 아름답게 보이던 아내가, 연애시절 늠름하게 보이던 남편이 수 십 년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그렇게 보인다면 거룩한 정견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내 판단과 느낌에 흔들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경지, 정녕 거룩한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앎과 느낌과 판단 너머의 모든 현존이 곧 신의 편재임을 직시할
줄 안다면 보다 드높은 경지라 하겠지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오복음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으로 잘 알려진 팔복 [八福, the Beatitudes] 내용 중 하나죠.
영어 표현 ‘pure in heart’ - 우리말로 옮기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heart’는 마음이 아니라 가슴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가슴이라 함은 또 뭘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이 ‘mind’라면 심정[心情]이 더 ‘heart’에 가까운 말이긴 한데, 또 심정이라 하면 뭔가 통속적인 의미가 강해 마땅한 번역이 아닌 듯 들립니다. 할 수없이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로 의역을
해보지만 이젠 순수하고 깨끗한 게 뭐냐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He who perceives Me everywhere
and beholds everything in Me
never loses sight of Me,
nor do I ever lose sight of him.
모든 곳에서 나를 인식하고
내 안에서 모든 걸 보는 이는
결코 내 모습을 여의지 않나니,
나 또한 그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느니라.
이제, 그리스도 말씀과 크리슈나 말씀을 같이 읽어 봅니다.
가슴이 순수하고 깨끗해 순심[純心]한 사람은 삼라만상 모두에서
신의 편재를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직시함을 늘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우리 곁에 왔던 부처 성철 조사께서도 늘 이렇게 질책했답니다, “잘 때도 되더냐?”
신의 편재를 ‘직시[直視]’함으로
그 분 안에 머무는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OM~
English for the Soul 지난 글들은 우리말 야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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