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개혁을 위한 시동은 일단 걸렸다. 지난 주말 덴버에선 관계자들의 대책회의인 2008 헬스케어 서밋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차기행정부의 보건후생부 장관 내정자인 톰 대슐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헬스케어 개혁은 강력하게 추진될 것”이라고 거듭 다짐했다. 다음 주부터 연말까지는 미 전국 곳곳에서 헬스케어 개혁에 대한 주민 포럼이 열린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현실적 아이디어를 제시할 보통사람들의 리빙룸 토론회다. 오바마 캠페인의 상징인 풀뿌리 운동의 일환으로 민의수렴은 공식홈페이지 www.change. go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접수되고 있다. 이미 1만여개의 개혁 아이디어가 올라왔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헬스케어 개혁을 2008 대선의 최우선 공약의 하나로 내걸었던 민주당 대통령 당선자와 민주당 의회를 선두로 고용주와 노조는 물론이고 그동안 개혁을 반대해왔던 보험업계와 의료업계까지 이제는 ‘거의 누구나’가 헬스케어 개혁이 필요하다고 동의한다.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주 발표된 미공공보건협회 ‘미국의 건강순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벌써 4년째 미국의 의료비 지출은 수직상승하고 있는데 건강상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선진30개국보다 2배 이상의 의료비를 쓰면서도 평균수명은 가장 짧고 유아 사망률은 가장 높다.
미국의 헬스케어제도는 지난 100년 동안 6차례이상, 거의 15년마다 개혁이 추진되어 온 난제 중 난제로 꼽힌다. 1912년 테디 루즈벨트 3선 도전 캠페인의 주요 공약이 전국민 의료보험이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소셜시큐리티 법안의 일부로, 해리 트루먼이 페어딜의 한 부분으로 추진했던 것도 전국민 의료보험이었다. 그 후 카터, 포드, 아버지 부시도 각각 시도했고 아직도 ‘악명’ 높은 빌 클린턴의 개혁안 ‘힐러리케어’도 있었다.
역대 개혁안은 번번이 실패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절실하고 시급하다는 개혁가들의 주장은 옳았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그들의 정치적 판단 내지 접근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번엔 실현될 수 있을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시동은 걸었지만 오바마와 민주당 의회는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톰 대슐은 ‘예산과 무역 등 다른 과제에 우선하느라 헬스케어 개혁의 정치적 타이밍을 놓쳐버렸던 클린턴의 실수를 되풀이 말자’고 다짐한다. 클린턴 측이 미적대는 동안 보험업계등 당시의 반대파가 개혁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미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주당 의회 리더들조차 외면케 만들었던 힐러리의 정치적 대응을 기억하는 오바마 역시 의회와 충분한 사전 합의를 이루는 등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 행정부의 헬스케어 개혁안의 세부사항은 아직 나온 게 없다. 세 가지 기본 방향만 확실히 하고 있다 - 보험가입을 확대한다, 가격을 낮춘다,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인다. 현행 직장보험제도를 유지하고, 무보험자를 구제하는 정부프로를 신설하여 병행 실시하려는 오바마의 헬스케어 공약은 사실 민주당 진보파가 원하는 개혁에는 한 걸음 못 미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일화된 국가운영 전국민 의료보험이다. “65세이상 노년층의 의료보험인 메디케어를 65세 이하 전국민에게로 확대하자는 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노벨경제상 수상학자 폴 크루그먼은 반문한다.
역대 헬스케어 개혁이 실패했던 다양한 원인 중 어느 시대에나 공통되었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정부가, 그것도 불신감이 높은 의회가 제안하는 새로운 제도를 수용하고 직장보험을 포기하는데 대한 불안감이다. 직장보험을 가진 1억8천만명이 반대하는 개혁이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더 큰 문제는 돈이다. 4,700만명에 달하는 무보험자를 커버하는데만 매년 1천억달러 이상이 필요한데 가뜩이나 적자에 시달리는 연방정부가 어디서 예산을 마련할 것인가.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시각은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헬스케어는 일부에게만 허용되는 혜택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1월 발표된 뉴아메리카재단의 보고서 ‘아무것도 안한 대가(Cost of Doing Nothing)’에 의하면 방치해둔 무보험자의 사망과 질병으로 인한 미국의 연간 생산성 손실은 최고 2,073억 달러로 산출되었다. 전국민 의료보험 시행이 더 싸게 먹힌다는 결론이다.
경제위기에 밀려 뒤처졌던 헬스케어 개혁이 요즘 최우선과제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경기침체가 대규모 감원을 초래하고 직장과 동시에 보험을 잃은 무보험자가 급증하면서 헬스케어가 경제구조의 한 부분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 들면서 연방의회엔 개혁법안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전국민 의료보험은 내 평생과업”이라고 천명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법사위원장에서 보건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이미 법안 제정에 착수했다. 3개 실무연구그룹을 구성하고 핵심 양당의원들과의 미팅도 주재하며 뇌종양 환자답지 않은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상원재정위원장 맥스 바우커스의 84페이지짜리 개혁안도 나와있고, 이직, 실직, 창업시에도 유지되는 ‘포터블 의료보험’을 강조하는 론 와이든 상원의원의 ‘헬시 아메리칸 법안’도 추진되고 있다.
헬스케어 개혁은 2조5천억달러 규모의 산업을 뒤흔드는 대대적 변화를 뜻한다. 단 한번에 한 개의 법안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년에 걸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법안을 통한 단계적 시행을 인내하며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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