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재외동포론 첫 소개 이병임 미주예총 회장
이병임 미주예총 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문화예술가로서의 자존심, 그걸 지키기 위해 ‘투사’와도 같은 삶을 살았고, 그 자존심 하나로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25년간 한국의 공연예술을 쉬임없이 꽃피워왔다.
언제나 당당하게 ‘문화예술계의 대표’로 나서는 그이 때문에 어떤 단체도 어떤 행사도, 문화예술계를 홀대하거나 얕보지 못했고, 매번 새로 부임하는 문화원장이나 총영사도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임기를 편안하게 마칠 수 있었다.
‘남가주의 유일한 한인 무용평론가로 이민 한 세대를 풍미한’(그는 기자가 한달여 전에 기사에 썼던 이 표현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이병임 미주예총 회장의 25년 활동이 마침내 그 가치와 공로를 인정받았다.
예술의 전당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정보관은 지난 11월3일부터 28일까지 ‘우리무용가의 미주지역 활동전: 무용평론가 이병임 편’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고 이회장의 자료와 기록들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했다. 이 전시회는 문화예술위가 기획하는 ‘예술과 기록’ 시리즈의 하나인데 해외공연예술인으로는 이회장이 처음 전시를 가졌다고 한다. 무용인으로는 김영태(작고·평론가), 육완순, 홍신자에 이어 네 번째라니 그가 한국 무용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한국의 원로무용가들인 강선영, 김백봉, 육완순씨가 초청인으로 나서고, 무용계 일인자들인 육완순, 이숙재, 이애자, 김말애, 박재희, 박명숙, 양길순, 인남순, 김긍수씨가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이 행사의 첫날 이병임 회장은 그녀의 무용인생 40년 자료를 문화예술위원회에 전달하는 기증식과 전시회 오프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미주지역에서도 무려 10명이 참석해 축하했는데 그 이름들 또한 대단하다.
하기환(전 LA한인회장), 정진철(세계한상대회 고문), 허상길(LA한인상공회의소 부회장), 잔 서(경제개발연구소 소장), 에드워드 구(전 남가주한인부동산협회 회장), 박종문(전 LA 한국문화원장), 임병수(전 LA한국문화원장·문화부 차관), 윤 영(전 안기부 부총영사), 이윤복(전 총영사), 박순태(전 LA한국문화원 영사·예술국장).
이 자리에서 한국의 초청인들은 하기환 정진철 홍명기 조병태 허상길 잔 서씨에게 “미주예총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의 감사패를 전달했고, 미주에서는 미셸 박 스틸 가주조세형평국위원이 초청인 3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처럼 큰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병임 회장은 흥분되면서도 홀가분한, 자랑스러우면서도 섭섭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나의 40년 무용 영혼을 떠나보낸 것처럼 섭섭합니다.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모아온 사진과 활자 자료를 모두 보냈지요. 미주에는 자료관이 없으니 한국에라도 기록으로 남게된 것이 다행입니다”
1968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해온 그의 무용평론일지와 이벤트 주관 연혁을 건네받아 훑어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작은 글자로 12페이지 빼곡히 정리한 그 방대한 양에 우선 기가 질리고, 그 오랜 세월의 자료를 세밀하게 보존해온 정성도 놀랍다.
1968년 7월 조흥동 무용공연을 보고 대한일보에 발표한 ‘새 방향 시도’란 글이 첫 평론이었다. 이후 2008년 9월8일 본보에 김응화 무용공연에 대해 쓴 ‘민족의 혼 실은 춤사위’에 이르기까지 미주한국일보를 비롯한 수많은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기관지, 그리고 LA타임스에 실린 공연평과 제언, 칼럼, 시론이 무려 265편이나 된다. 전통무용에서부터 현대무용, 발레, 민속무용, 뮤지컬과 북한무용, 고전과 창작을 아우르는 모든 공연예술이 날카롭게 해부하고 비판하며 격려하는 그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벤트 주관 연혁 또한 엄청나다.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는 남가주에서, 그것도 ‘먹고 살기 바빠서’가 모든 궁색의 변명이 되는 한인이민사회에서, 그가 주최한 대형 무용행사만 50회가 넘는다. 일년에 평균 두 차례씩 일을 벌였다는 얘긴데 그중 36회는 한국의 인간문화재나 무용계의 일인자 혹은 유명 무용단들을 불러와 이곳 무대에 세운 초청공연이었다.
인간문화재 이매방 같은 이는 86년, 89년, 93년, 95년, 98년, 다섯차례나 이곳을 찾았고 이애주, 강선영, 육완순, 김말애, 양길순 등 각 무용분야의 일인자로 평가되는 무용가들이 수없이 이병임의 초대로 공연을 가졌다. 인간문화재 김기수, 김천흥, 김백봉, 정양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박명숙 서울현대무용단, 인천시립무용단, 김말애 춤타래 무용단 등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유수 무용단들이 이회장의 단골 초청단체였다.
2007년 김말애 박명숙무용단 초청공연 및 미주예총 22주년 기념 자료전시회를 LA한국문화원에서 가진 것이 이벤트 리스트의 맨 마지막 줄이다. 그 다음 줄에는 아마 2009년 여름으로 예정된 컨템포러리 무용단의 ‘수퍼스타’ 공연이 기록될 것이다.
숱하게 많은 공연을 치러낸 그이지만 그러나 “이번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행사 한번 유치하는데 최소 4만달러는 가져야 하는데 이곳 기업들이 문화에 투자 안 하는건 다 아는 사실이고, 경기침체가 겹쳐 아주 고된 작업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 “돈 달라고 손 내미는게 이젠 무섭고 구질구질하다”고 푸념하는 이회장은 그렇게 칠십이 넘는 세월 동안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외롭고 힘들고 고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화려하고 번잡한 삶을 살았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남가주 한인사회의 중심에 있었고, 언제나 그 목소리가 들리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지금은 올드타이머라지만 아직도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그의 무용인생을 총정리했지만 그는 정리를 끝내지 않았다. 아직도 뜨거운 마음으로, 연애하는 마음으로, 여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랑하는 이 열정덩어리의 여인을 멈출 수 있는 건 당분간 없어보인다.
<정숙희 기자>
왼쪽부터 김숙자 전 이대체육학장, 인남순 궁중무용전문가, 이병임 회장, 양길순 도살풀이 전수조교,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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