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식을 떠나 기사처럼 소설을 쓴 김훈과
진영의식에 쩔어 소설처럼 기사를 쓴 기자들
▶남한산성은 조선 중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임금(인조)이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기까지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신문기자 출신 소설가 김훈이 썼다. 김훈은 이 소설 들머리에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에둘러 씹었다. 세상을 편갈라 보는 것은 우선 편하다. 어느 편에서 보면 선악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영의식은 세상을 두루 살피는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십상이다. 내 편의 선이 네 편의 악이 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에는 ‘편’이 분명하다. 누란의 위기에 놓인 조선과 침략자 청나라가 그 첫째다. 사방이 포위된 남한산성 안에서도 편은 있었다. 크게 보아 죽기로 싸우자는 부류(주전파 또는 척화파)가 있었고, 싸워봤자 궤멸뿐이니 백성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강화를 맺어야(항복을 해야) 한다는 부류(주화파 또는 강화파)가 있었다. 주전파의 핵은 김상헌이었고 주화파의 핵은 최명길이었다. 둘의 세계읽기는 판이했다. 김상헌은 명분을, 최명길은 현실을 중시했다. 오래된 역사책이나 사극에서 김상헌은 불굴충절의 화신처럼, 최명길은 어딘지 사대주의자 내지 매국노 냄새가 나게 그려지곤 했다.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매국노인가, 누가 더 현명한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작가 김훈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했다. 가치판단을 철저하게 유보한 채 그는, 마치 제3국 출신 종군기자의 눈으로, 김상헌과 최명길을 양 축으로 하고 인조를 정점으로 한 대립과 갈등을 꼬치꼬치 그려냈다. 죽어 널부러진 자들의 참담한 모습이며 살아남은 자들의 절망적 모습이며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그날그날 생활상을 사진을 찍듯 짚어냈다. 샅샅이 훑어낸 사료에다 작가의 상상력을 얽어 만든 남한산성은 출간과 거의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눈뜨임의 계기가 됐다는 등 갖가지 상찬이 따랐다. 그것까지 내다봤는지 김훈은 서문에다 미리 쐐기를 박아놓았다, 남한산성은 어디까지나 소설로 읽혀져야 한다고.
▶소설가의 상상력이나 판단력에는 제한이 없다. 소설가 맘이다. 그러나 소설가 김훈은 군데군데 상상력으로 살을 붙였으되 뼈대는 완고하게 그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한 팩트(사실)에 충실했다. 종군기사 혹은 남한산성 잠입르포 같은 소설을 썼다.
그렇다면 처음도 끝도 팩트에 충실해야 할 기자들은?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스포츠 기사를 다루는 기자들로 좁혀보면, 나아가 박찬호 박지성 박주영 등등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을 다루는 기자들로 더 좁혀보면, 답은 비교적 또렷해진다. 그들이 쓴 기사들 가운데 태반은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말대로 어느 한편에 서는 것만 거부(아니면 잠시 사양)하면 훤히 보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고 줄창 한편에 서서 외눈박이 기사들을 양산하다 코가 빠진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본란에서도 지적했듯이 올해 5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한국언론매체들은 그것이 마치 박지성을 위한 잔치인 양 온갖 아전인수와 영어오역에다 독심술까지 곁들여 배가 터지도록 김칫국부터 마셨지만 정작 박지성은 스타팅 멤버는 고사하고 후보명단에도 들지 못한 채 스탠드에서 양복 차림으로 관전했다. 이쯤 되면 좀 겸연쩍은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건만 한국의 축구도사 기자들은 입을 싹 씻었다. 그랬기만 하면 다행이다. 도리어 박지성 결장에 모스크바(결승전이 열린 장소)가 깜짝 놀랐다는 등 초를 치는가 하면, 맨U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배신을 때렸다는 등 억지를 부리며 자신들의 오보에 대한 변명을 또다른 오보로 메꿔나가는 처량한 모습을 보였다.
소설 같은 기사 걸작선은 요즘도 변함없다. 기자라 아니라 작가라 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박찬호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기사원, 아니 소설원이다. 조금 잘했다 하면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를 말아먹기라도 한 듯이, 그가 LA 다저스의 하나뿐인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이 난리를 친 횟수를 일일이 손꼽을 수 있을까. 다저스 전담기자가 다저스에 관한 기사를 쓰다가 박찬호를 한줄이라도 언급하면 미 언론, 박찬호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데서 호외라도 찍은 듯이 호들갑을 떤 경우는 또 몇 번인가. 영어원문을 아전인수로 해석해 뻥튀기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물론, 개중에는 객관적으로 쓰려고 무진 애쓴 기자들도 있다. 객관적인 기사를 쓰고나면 이들은 거의 반드시 공격을 당한다. 단골메뉴 공격화살은 대강 이렇다. 넌 딴나라 기자냐, 그래 너 잘났다, 너는 분명 왜x의 자손일거야 등등.
▶LA 다저스가 자유계약선수(FA) 대상자들에 대한 연봉조정신청 마감일인 1일, 총 14명의 FA 가운데 3명에게만 연봉조정신청을 냈다. 강타자 매니 라미레스(외야수), 우완 선발투수 데릭 로우, 주전 3루수 케이시 블레익이 그 대상이다.
연봉조정신청은 구단의 ‘보험성’ 재계약 의사표현이다. 그렇다고 해당 FA들의 다른 팀 이적 기회가 봉쇄되는 건 아니다. 다른 팀과 짝짓기 협상을 벌이되 안되면 원래구단과 적어도 1년 재계약을 할 수 있다. 선수로서는 다른 팀과의 협상이 실패해도 원래팀에서 뛸 수 있느니 협상에서 배짱을 튕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단은 괜히 남좋은 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연봉조정신청을 한 선수가 다른 팀으로 옮길 경우, 그 선수가 A급과 B급이면 옮겨간 팀으로부터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을 보상받는다. 즉, A급인 라미레스가 SF 자이언츠와 왔다면 자이언츠는 신인드래프트 때 선수지명권을 일정부분 다저스에 넘겨줘야 한다.
아무튼 박찬호는 다저스의 1차적 러브콜을 받지 못했다. 다저스의 FA 중 연봉조정신청을 받지 못한 선수는 박찬호를 포함해 라파엘 퍼칼(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유격수 또는 3루수), 제프 켄트(2루수), 그렉 매덕스(선발투수) 등 11명이다.
현 시점에서 이들 모두 다저스의 버림을 받았다는 건 아니다. 다저스를 포함해 어느 구단과도 이적협상을 벌일 수 있다. 혹은 나이 때문에 혹은 연봉 때문에 혹은 겹치는 포지션 때문에, 이들을 보는 다저스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손을 잡기보다는 이번 겨울에 갈라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박찬호는 붙박이 선발투수 보장을 선결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다저스의 선택폭은 더욱 좁아졌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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