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이 가시나야. 헬로 소리만 하고 안 나올끼가?”
말소리도 끝나기 전 쨍쨍하게 울리는 소리에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 내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한국에 있는 둘째 언니였다. 무슨 일로 화가 나 이 밤중에 소리를 지르나 하고 소지는 잠깐 생각해 본다. 한달 전 큰언니한테서 이번 어머니 기일에 왔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소지는 어머니 장례식 때 갔다온 후 매년 기일 때 언니한테서 연락을 받았지만 한번도 못나갔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일이 생겼다. 소지는 이번에도 못 갈 것 같았다. 그래서 잊고 있는데 황소 같은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의 성격이 남자 같고 일도 황소처럼 잘한다고 할머니가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래도 칠 남매 중 막내인 소지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언니다.
“언니. 미안해 이번에도......”
“왜, 출가 외인이라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이곳 형편이 좀.”
“이 가시나야. 친정 왔다간 지 10년이다. 그렇게도 자유가 없나?”
“언니. 왜 자꾸 그런 말만하고 있어?”
“이것 봐라, 미국에서 산다고 자식 도리도 다 잊어버렸나. 장 서방 바꿔봐라.”
“지금 집에 없어.”
“또, 외박이가?”
“어제 출장 갔어.”
“너 장 서방하고 무슨 일 있지?”
“꼭 무슨 일 있기를 바라는 사람 같네.”
“일 없다면 다행이고, 내 말 잘 들어.”
언니의 음성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 인간 바람둥이다. 빼앗기고 후회하지 말고. 네가 잘 해줘야 한다. 내가 가까이 있으면 혼을 내줄긴데.”
“언니 그렇지 않아.”
소지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한다고 한국에 전화했을까.
“그래, 너 말 믿을게. 넌 우리 칠 남매 중 어무이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안 자랐나. 그런 네가 어무이 앞에 밥 한번 올려봤나?”
“언니 미안해.”
“어무이가 네 미국으로 떠나 보내고 얼마나 울었는지 니 모를 끼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너를 생각한 어무이였다. 의식을 잃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눈을 뜨고는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일어나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그리고 두 시간 후 돌아가셨다.” 1.
소지는 언니의 말을 듣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쉰다.
“언니. 그런 말을 왜 이제 해.”
소지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말을 했다. 소지의 눈에 고였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소지야. 어무이는 다시 안 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노. 여기 있는 가족들도 다 너를 보고싶어 한다. 그러니 한번 왔다가거라.”
“오빠, 언니 건강은 좀 어때?”
“큰오빠 내년이면 일흔 다섯 아이가.”
“그렇게 되었어?”
“이젠 우리 세대도 떠날 준비를 해야 안되겠나.”
“큰언니 전화 받았을 때 기운이 없더라.”
“그 집은 막내가 문제 아이가.”
“그러고 보니 걱정 없는 가정이 없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했는데, 요즘은 가지가 한둘 있어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 같더라.”
“시대가 변해 삶의 양식이 달라져가니 사람의 가치관도 바뀌니까 그런 것 같아.”
“요즘 나 같은 늙은이는 신세대를 따라가기 정말 힘들다. 그건 그렇고. 소지야. 힘들겠지만 너 얼굴 한번 보자.”
“그래 언니, 가도록 해볼게.”
“꼭 와야한다. 이번에 안 오면 전화도 안 할 끼다. 이 가시나야. 약속하는 거다.”
소지는 전화를 끊고 냉장고에서 보리차 한 컵을 따라 마신다. 소지는 남편인 장 서방과 3년째 별거 생활을 하고 있다. 장 서방은 이혼 서류에 빨리 사인하라고 독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지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혼녀란 이름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고 싶지 않고, 젊은 것 깨 쏟아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한때 주위에서 이혼이 무슨 유행처럼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쉽게 가정을 버리고 사회 나가봤자 알아주는 사람 없고, 직장서도 찬밥신세가 되니 마음 고생이 되어도 이혼을 안하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 지금은 이혼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어봤자 빛 좋은 개살구니까 그렇지.’ 소지는 콧방귀를 뀌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지는 일주일 후 한국으로 가 서울 강남 버스 터미널 근방에서 자고 거제도 장승포 가는 매표소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장승포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언니가 말해주었다. 매표소 줄 끝에 오십대 중반쯤 된 남자가 서 있었다. 소지는 그 남자 뒤에 바싹 다가섰다. 키도 크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소지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 남자가 표를 사들고 갔다. 소지는 매표원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그 남자 옆 좌석을 달라고 했다. 소지는 출발 시간이 남아 있어 대합실 의자에 앉아 들고 온 책을 펴들었다. 활자 속에는 조금전 본 그 남자의 서글서글한 눈빛이 어른거렸다.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왜 이런 망상이 생기나 하고 소지는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다 버스에 올라가 앉았다. 소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그 남자를 기다렸다. 출발 10분전이 되었다. 그 때 그 남자가 승강구 계단을 올라와 안쪽으로 걸어왔다.
2.
소지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고개를 살짝 들어 그 남자를 쳐다봤다.
“아버지 저쪽에 앉으세요.”
그 남자 뒤엔 칠십 된 노인이 서 있었다. 소지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몸을 옆으로 해주었다.
“아버지. 신현읍 터미널에 형님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래, 빨리 가봐.”
그 남자는 노인한테 인사를 하고 내려버렸다. 소지는 다리를 쭉 뻗으면서 의자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이번 여행으로 입안에 핀 곰팡이나 없애볼까 했는데 다 틀렸네. 남자 복 없는 년은 잠자는 것이 상책이다.’ 소지는 혼자 중얼거린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