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를 개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사자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물론 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개는 사자보다 더 사람에게 다정하고 친근하고 친화력이 있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 사자는 개보다 더 우위에 있다. 사자는 개보다 더 날카롭고 위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자의 우위는 오직 살아 있을 때뿐이다. 사자가 죽으면 살아 있는 개보다 못하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도서 9:4)
사자가 아무리 동물의 왕이라 하지만 죽은 사자는 먹이를 잡기 위해 넓은 들을 휘젓고 다닐 수 없고, 동물의 세계를 호령하기 위해 하늘을 울리게 하는 사자후(獅子吼) 소리를 낼 수 없다. 살아 있을 때 벌벌 떨던 다른 동물도 사자가 죽으면 아주 하찮은 벌레까지 죽은 사자의 시체에 와서 기웃거리게 된다. 하지만 힘없게 보이는 개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도둑에게 짖어댈 수 있고, 주인을 따라 다니며 꼬리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사자이면서 개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이면서 사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 정말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사자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늘 개로 여겼다. 개로 여긴다는 말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록 선민이라 하지만 사람을 무시하는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죄악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만의 선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개로 여겼던 가나안 족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이 귀신들렸으니 고쳐 달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그 여인이 도와 달라고 해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런 예수님의 무관심에도 계속 딸을 고쳐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말씀에도 굴하지 않고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태복음 15:27)
이 가나안 여인은 스스로 자신을 개로 여겼다. 개 취급을 당하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사자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자와 같은 용기가 있었다. 비록 그의 모습은 천하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사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개에 지나지 않았다. 가나안 여인은 산 개였고 당시의 유대인들은 죽은 사자였던 것이다.
조선 역사에 이순신 장군처럼 멋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과보다는 그의 사자 같은 용기와 포용력에 매력을 느낀다. 원균 세력에 의해 장군에서 일개 병졸로 강등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여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이순신의 마음에 남아있던 것은 단지 그의 직책이 아니라 나라를 향한 그의 마음이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사랑의 신념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장군으로서 명령하는 그 호령을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싸워 죽는 것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비록 장군이 아닌 졸병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살아있는 개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죽은 사자보다는 더 큰 힘과 위용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다시 살게 했다. 개로서 죽었기에 다시 살게 된 사자가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자로 표현된다(호세아 13:7). 그런데 사자이면서 개처럼 죽으셨다. 하지만 개처럼 죽으셨지만 사자처럼 살아 나셨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설령 천하고 낮은 개의 삶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사자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낮은 자가 높아지고, 높아지는 자가 낮아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썩은 것은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희망이 없다. 요즘같이 어려운 삶의 환경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기지개를 펼 수 있고,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런데도 겁에 질려 죽은 개가 되고 만다. 꼬리를 내리고, 움츠리고, 마음마저 좁아져 자기 밥그릇만 바라보고 있다. 경제가 힘들다고 한숨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작은 사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지구가 무너진다고 호들갑을 떨던 동물들의 요동을 사자가 잠재웠듯이 잠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웃고 무엇 때문에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가져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가졌기 때문에 여유가 있고, 없기 때문에 기가 죽는 것은 죽은 사자의 모습이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넓은 마음과 여유를 즐기는 것은 살아 있는 개의 모습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그 이상의 것을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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