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캘리포니아 주시사를 3번이나 연임했던 얼 워런은 초당적 정치가로 이름났었다. 공화당이었지만 주지사 출마 때 민주·공화 양당 모두에서 지명을 받는 이변을 일으킬 정도로 당파를 초월해 신뢰를 받았다. 당시 중도보수 성향의 연방대법원장을 물색하던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선기준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자신의 판단이 빗나갔음을 깨달은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대법원장에 취임한 후 워런이 줄줄이 이끌어낸 판결은 공화당의 기본 이념 보수는커녕 강한 진보의 색채가 역력했다. “내 일생 최대의 멍청한 실수”라고 아이젠하워는 개탄했으나 워런의 대법원은 미국을 평등사회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60년대 보수진영의 슬로건은 “얼 워런을 탄핵하라”였지만 진보와 중도에선 ‘수퍼치프’라는 애칭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54년 역사적인 인종통합교육을 명한 브라운 판결과 멕시코계 이민자의 재판을 통해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명시한 미란다 판결을 비롯,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약자를 보호하는 수많은 판결을 내리며 그는 민권과 개인자유의 확대를 실현시킨 대법원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얼 워런을 자신의 이상형 대법원 판사로 꼽는다.
지난주 연방대법원이 조용히 2008-2009년 새 회기를 시작했다. 지난 2~3년새 대법원 판사들의 물갈이에 의해 보수로 기운 이후 핫이슈의 판결을 양산하면서 뉴스의 초점이 된 것에 비하면 금년의 개정 주변은 너무 조용하다. 하긴 경제위기가 발등의 불로 2008년 대선 캠페인을 압도하면서 ‘연방대법원’은 아예 논의대상에서 밀려나 버렸다. 경제의 늪에 빠진 유권자들의 관심도 멀어졌지만 대법원 자체도 캠페인의 대상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11월4일 투표일까지의 심리 스케줄엔 뜨거운 논쟁 케이스는 별로 배정되지 않았다. ‘조용한 회기’ 운영이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년 대선에서 연방대법원은 유권자가 관심밖으로 내쳐도 좋을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오바마 행정부’나 ‘매케인 행정부’가 그 수명을 다한 후에도 다음 세대의 미국인 일상에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가장 중대한 이슈중 하나가 바로 연방대법원이다. 차기 대통령이 어떤 성향의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느냐에 따라 미국사회의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파 4명, 보수파 4명, 중도보수 1명 등 현 9명의 대법원 판사 중 아무도 공개적으로 은퇴의사를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차기대통령의 임기중 1~3명은 바뀔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은퇴 가능성은 평균연령 61세의 보수파보다는 88세 고령자까지 포함된 평균 75세의 진보파 쪽이 훨씬 높다. 예상대로 앞으로 몇 년내에 진보파 3명이 모두 은퇴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연방대법원 내는 물론이고 미국사회의 이념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올 수도 있다.
공화당으로는 70여년만에 사법부의 완벽한 보수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을 것이지만 민주당으로선 보수로 약간 기운 현재의 위태위태한 균형이라도 유지하자면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만약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 승리하고 진보파 판사들이 은퇴한다면 낙태권과 민권, 환경보호와 종업원 및 마이너리티 보호가 어디까지 뒷걸음질 칠 것인가…진보진영은 ‘벼랑에 선 대법원’이라고 경고하며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념이 이슈화되면 극단적 양 진영의 대결이 너무 치열해 매케인도, 오바마도 애써 거론하려 하지 않지만 대법원에 대한 두 후보의 시각 차이는 뚜렷하다.
매케인의 시각은 사법부에 관한한 일관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대선 후보가 된 지금은 존 로버츠, 새뮤얼 얼리토, 앤토닌 스칼리아 등과 같은 보수파 판사를 자신도 지명하겠다고 천명하지만 상원청문회에선 확실한 진보판사인 루스 긴즈버그와 스티븐 브레어의 인준을 찬성했다. 지금까지의 그의 성향으로 보아 저 말이 보수표밭 향한 공약일까, 평소 소신일까, 확신은 안 가지만 어쨌든 그가 밝힌 판사의 지명기준은 “법을 쓰여진대로 충실히 적용하며 사법부 판결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부과하지 않는 법조인”이다.
오바마도 낙태권이나 어퍼머티브 액션등 대법원과 직결된 이슈를 유세장에서 자진해 꺼내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법학전공답게 사법부에 대한 입장은 명확하다. 보수파 로버츠와 얼리토의 인준에도 반대표를 던졌고 같은 흑인이지만 극우 보수인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원판사에 대한 공개적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법원의 역할 중 하나는 아웃사이더와 마이너리티 등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한 정치적·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가 밝히는 ‘오바마 대법원’의 한 단면이다. 그 대법원을 이끌어 갈 후보군에는 한인 고홍주 예일법대 학장도 거론된다.
선거가 정확히 3주 남은 15일 현재 표밭의 기류는 오바마 우세가 계속 강화 중이다. 지지도는 14개 전국여론조사 평균결과 49.8% 대 42.5%로 벌어졌으며 확보예상 선거인단도 286명대 158명으로 오바마가 우세한 접전지 94명을 넣지 않아도 당선권 270명을 훌쩍 넘어섰다. ‘대법원의 내일’만 생각한다면, 상당히 다행스러운 판세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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